본문 바로가기
중국문학

성당 왕창령(王昌齡,王昌龄)의 <부용루송신점>(芙蓉樓送辛漸,芙蓉楼送辛渐)

by 유경재 2024. 6. 10.

이 시는 성당 변새시의 대가이자 칠언절구의 고수인 왕창령의 유명한 송별시다. 시의 제목에 보이는 부용루는 당시에는 윤주(潤州)인 지금의 전장시(鎭江, 镇江)에 있는 유명한 누각이다.

이 시의 창작배경은 작가가 당시 어떤 이유로 지금의 남경인 강녕(江寧) 현승으로 좌천되었을 때, 작가의 친구가 방문하러 왔다가 낙양으로 떠날 때 남경에서 친구와 함께 전장의 부용로까지 와서 전송할 때 지은 시로 보인다.

부용루는 원래 명칭이 서북루(西北樓)로, 윤주 즉 전장시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기에 오르면 장강과 대운하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2020년 초 서주에 있을 때 여행 계획까지 세웠다가 코로나의 발발로 무산된 게 못내 아쉬었었는데, 이번 6월 초 연휴 기간에 마침 양저우(扬州) 여행 기회가 있어 양저우에서 시간을 일부러 내어 부용루를 찾았다.(2024.6.8)

우선 시의 내용을 보기로 한다.

평측과 압운을 표시한 시

 

작가의 친구였던 신점은 아마도 여기서 대운하를 따라 양저우를 거쳐 낙양으로 향했을 것이며, 때문에 작가는 낙양의 지인이나 친구들이 자신의 안부를 묻거든 자신은 추호의 욕심이나 잘못이 없으며, 지금도 얼음 같이 깨끗하고 청렴한 마음을 견지하고 있다고 전해달라고 하고 있다.

첫째 구의 의미는 "차가운 비가 장강에 이어지듯 줄기차게 많이 내리는 한밤중에 옛날 오나라 땅이었던 윤주로 들어왔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둘째 구의 "초산"은 옛날 초나라 지역이었던 남경에 벼슬하고 있는 작가 왕창령 자신을 가리킨다.

마지막 구의 시어, 빙심(氷心)은 훗날 1900년에 태어나 1999년에 작고한 현대 여류문인인 사완영의 필명으로 쓰이기도 했다.

전장시는 양저우에서 비교적 가까운 도시로, 하루에 몇 편씩 시내버스가 왕래하고 있었다.

다행히 묵고 있던 호텔 부근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15원 버스비를 내고 대략 1시간 정도 걸려서 전장시의 금산(金山)공원이란 정류장에 내렸다.(부용루가 금산공원 안에 있음)

마침 토요일이자, 중국의 대학 수능이라고 할 수 있는 가오카오(高考)가 있는 날이라 시내 도로는 차단된 곳이 더러 보인다.

양저우를 지나 전장으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를 타는데, 가는 중간에 넓은 강이 보이는데 짐작컨대 대운하가 아닌가 싶었다.

예전에는 부용루에서 장강과 대운하를 굽어볼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 위치도를 보니 그 지류의 한 호숫가에 있는 것 같다.

 

공원 입구에서 왼편으로 한참 걸어가니 이렇게 호숫가로 나무데크로 된 길이 부용루쪽으로 이어져 있다.

 

이 누각이 바로 부용루다.

 

아니다 다를까 누각을 유명하게 해 준 시가 입구부터 나를 맞이한다.

 

부용루는 원래 동진 시기에 창건되었으며, 왕창령의 이 시로 유명했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현대 1992년에 중건된 건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위치는 정확히 고증하고 지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왜냐? 장강이 보이지 않으니까.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이 옥 병 속에 있다네.

 

연꽃을 닮은 누각이라 부용루인가?

연꽃이 많은 곳에 세워진 누각이라 부용루인가?

 

안으로 들어가니 그냥 아무 것도 빈 공간에 의자가 몇 개 있어 여행객들이 쉬고 있다.

그리고 2층으로 난 계단은 출입금지라고 되어 있다.

아쉽다.

산을 옷깃으로 삼고, 장강을 허리띠로 삼았네.

 

부용이란 말이 연꽃이니

일부러 주변에 연꽃을 심은 듯.

 

오직 왕창령의 시 한 수 때문에 한국에서 양저우로, 양저우에서 다시 전장시로 찾았으니 시의 위력이 나에겐 정말 대단하다고 하겠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부용루를 찾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부용루에서 나와 공원 중앙에 있는 금산사를 찾으니 그곳엔 인파가 넘쳐난다.

마침 가오카오 날이라 그런지 모두들 향불을 피우고 열심히 기도하고 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