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에 도착한 이후로 처음 관광을 나섰던 곳이 바로 이곳 "시마타이"이다.
시마타이는 진시황 사후 유방과 함께 천하를 쟁패하던 천하장사 항우의 전설이 서려있는 곳으로, 서주 시내 거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서주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bc206년 천하의 영웅 항우(项羽)가 강동땅에서 숙부 항량과 기의하여 진나라를 친 뒤에 스스로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고 하면서 이곳 서주,당시 지명 팽성(彭城)에 도읍을 정했다. 그리고 성 남쪽 몇 리 되는 남산 위에 누대를 짓고 부하들이 말을 조련하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그래서 이름을 희마대(戏马台)라고 했다。역대로 이곳에 적잖은 건축물이 지어졌는데, 예를 들면 대두사(台头寺), 삼의묘(三义庙), 명환사(名宦祠), 취규서원(聚奎书院), 용취산방(耸翠山房), 비정(碑亭) 등이 그것이다. 세월이 감에 따라 옛날 건축물은 벌써 사라졌고, 지금은 새로 지은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강소건축학원에서 游2번을 타고 妇女保健院站에 내려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시마타이 바로 옆에는 서주민속박물관이 있고,(유료) 또 머지 않은 곳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서주박물관(무료)도 있다.
호부산 옛 주택거리가 있다고 되어 있는데, 입구라는 한글이 반갑다.
이곳에는 연극이나 학술활동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시간이 촉박하여 우선 민속박물관은 입구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본래 목적지 시마타이(바로 왼쪽)로 향한다.
항우의 시마타이 관람안내도.
입장료는 30원. 우리돈 6천 원 가까이 하니 비싼 편이다.
서주에는 높은 산이 없는 대신 야트막한 구릉 같은 산이 곳곳에 있다.
이곳 시마타이도 약간의 구릉 같은 곳이다.
그래도 이곳은 정식 명칭이 남산이다.
항우상.
항우가 어릴 때 진시황의 행차를 보고 자기가 반드시 저 자리에 있겠다고 했다던가.
천하의 영웅 항우가 어쩌다 촌부 출신 유방에게 패하고 말았던가.
천하를 호령하던 그가 해하성의 포위망을 벗어나 도망가다가 오강에서 자결할 때 그의 나이가 과연 몇 살이었던가?
겨우 31살에 불과했다. 이십 대에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이었다니...
여기가 바로 희마대가 있던 자리인 모양이다. 이 구릉의 제일 높은 곳.
장기의 유래가 되기도 한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의 전쟁.
몇 개의 건물 안에 이러한 옛날 전쟁의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청나라 만력 11년 겨울에 단양의 강사창이 쓴 글씨.
황금색 기와지붕들.
그리고 장랑.
이곳에는 홍문지회의 이야기를 형상화해놓았다.
회색빛 옷 입은 사람이 유방일 것이다.
홍문연이라고도 하는 이 연회는
전적으로 열세에 있던 유방이 진나라 도성 함양을 먼저 차지하고 뒤늦게 도착한 항우가 힘을 믿고 자기가 패왕이 되고 유방 등 다른 장수들을 제후로 분봉하였는데, 이때 항우는 시골 출신의 유방이 천하의 주인 자리를 놓고 경쟁할 만한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모사 범증만은 달랐다. 범증은 이때야말로 유방이라는 후환을 없앨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하여 그는 항우에게 여러 차례 유방을 죽일 것을 눈치 주었으나 항우는 거듭 이를 무시했다. 이에 범증은 항우의 사촌동생 항장(項莊)을 시켜 검무를 추는 척하면서 유방을 죽일 것을 지시했다. 항장이 연회장 내에서 번뜩이는 칼을 들고 검무를 추기 시작하자, 유방의 모사 장량은 유방이 위태롭다고 판단하고 즉시 중무장한 번쾌(樊噲)를 불러들였다. 번쾌의 소란스런 입장에 놀란 것도 잠시 항우는 짐짓 여유를 부리며 번쾌에게 술과 날돼지고기를 내렸다. 번쾌가 호기롭게 이를 모두 먹어 치운 뒤 다른 사람의 유언비어를 믿고 공을 세운 유방을 죽이려는 행동은 진나라의 행패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책망하듯 말했다. 항우는 이에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머쓱해진 항우가 마지못해 번쾌를 자리에 청하자 험악해진 연회장의 분위기는 가라앉는 듯했다. 유방은 이때를 기회 삼아 몰래 말을 타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항우는 홍문의 회합에서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유방을 죽이지 못한 것이 자신의 운명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다. 오직 항우의 모사 범증만이 이를 한탄할 뿐이었다.(이상 다음백과 사진 참고)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 전해오는데, 홍문연에서 유방을 없앨 계획이 항우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자, 범증은 이렇게 말했다고 적고 있다.
"저 새끼 하고는 천하를 도모할 만하지 못하다."고
이후 4-5년 간 이어지는 초한의 전쟁.
전쟁에 지친 두 나라는 마침내 홍구에서 평화회담을 열고 천하를 반반으로 나누어 다스리기로 협정을 맺는다.(서쪽은 유방이 동쪽은 항우가)
그리고 오랜 전쟁에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각자의 나라로 회군하는데...
이때 유방의 막료인 장량, 한신 등이 유방에게 회군하는 초나라를 급습하자고 하고, 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반대하던 유방도 마침내 동의하여 말머리를 돌려 회군하는 초나라 군대를 급습, 해하성에 포위, 사면초가의 전략까지 구사하니 마침내 항우의 명운도 종말에 이르고 만다.
항우는 특이하게 애첩 우희를 전장에 데리고 다녔었는데, 마지막 해하성 막사 안에서 우희와 함께 그 유명한 <해하가>와 <우희답가>를 후세에 남겨놓았다.
<해하가(垓下歌)>
力拔山兮氣蓋世 (역발산혜기개세)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뒤덮었지만
時不利兮騅不逝 (시불이혜추구서) 시운이 불리하니 오추마가 나아가질 않네
騅不逝兮可奈何 (추불서혜가나하) 오추마가 나가지 않으니 어찌 하리오
虞兮虞兮柰若何 (우혜우혜내약하) 우야 우야 너는 또 어찌 할까
이 노래를 들은 우미인이 <답가>를 짓는데,
漢兵已略地(한병이략지) 한나라 병사들이 이미 모든 땅을 차지하였고
四方楚歌聲(사방초가성) 사방에서 들리느니 초나라 노래뿐
大王意氣盡(대왕의기진) 대왕의 뜻과 기운이 다하였으니
賤妾何聊生(천첩하류생) 소첩 또한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노래를 마친 우희가 항우의 칼을 받아 자결하니 그들의 슬픔 어떠했겠는가?
<해하가>(우측부터 세로로)
해하성에서의 전투.
지금의 안휘성에 해하성 유지가 있다는데, 성은 없고 다만 그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
팽성대전(彭城大戰)은 초한전 기원전 203년 당시 유방과 항우가 초나라 팽성에서 벌인 대규모 회전으로 항우가 유방의 60만 명의 군사를 거의 전멸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당시 유방은 한신을 필두로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서주인 당시 초나라 수도 팽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으나 결국 대패하고 만다.
<해하가> 중의 "(역)발산(기)개세". 발산개세.
여름 관광은 더위와의 전쟁이다.
더위 때문에 제대로 구경한 것인지도 모르게 일단 밖으로 나오는데,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린다.
시마타이 바로 앞에 천막을 치고 관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초상을 치르는 모양이다.
다시 시내쪽으로 걸어가는데 이 일대가 고건축물 거리, 이를 테면 우리의 서울의 북촌, 서촌 등에 해당한다고 할까.
비탈진 골목이 한적하다.
그 중에 한 집. 최씨 한림.
어쩌면 옛날 한림원 벼슬을 했던 최씨 가문의 집일 듯.
최도의 고거라고 한다.
마당의 석류나무.
그러고 보니 서주에는 유독 석류나무가 많아 보인다.
대문 안의 가림벽에 쓰인 복자.
이런 복자도 있고.
대충 둘러보고 다시 나와 시내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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