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호텔의 조식을 먹는다. 6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가 간단한 뷔페식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서 합비 여행을 시작한다. 우선 숙소에서 가까운 보행가에 위치한 이홍장의 고거를 찾기로 한다.
이홍장(李鸿章:1823-1901)은 청나라 말기의 명신(名臣)이자, 양무운동(洋务运动)의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이며, 합비 사람이다. 시호는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와 같은 문충(文忠)이다. 회군(淮军)과 북양수군(北洋水师)의 창시자이며 총수였으며, 관직이 직례총독겸북양통상대신(直隶总督兼北洋通商大臣)에까지 올랐다. 증국번(曾国藩)、장지동(张之洞)、좌종당(左宗棠) 등과 함께 “중흥사대명신(中兴四大名臣)”으로 불린다. 안휘성, 특히 합비 사람들이 긍지를 가질 인물이다. 삼중으로 된 집에 대부분 이홍장의 사적에 관한 자료들을 전시해놓고 있었다.
보행가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 이홍장 고거.
오전인데도 주말이라 찾는 사람이 많다.
합비 사람 이홍장. 그의 가족 주택인 이곳은 1999년부터 정식으로 개방되었다.
소흥에서 가 보았던 노신고거보다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ㅁ
관리들이 입는 옷, 관복의 가슴에 다는 무늬.
직위, 직급에 따라 무늬가 다르다.
일종의 흉패인 이것을 보자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홍장 고거 가는 길에 보이는 장사진의 가게.
어젯밤에 봤던 그 가게다.
아마도 합비의 명물인 모양이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줄을 서는 것을 보면.
낮에 걸어보는 보행가.
두 손을 마주한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보행가 이름이 회하로인데, 회하는 안휘성 북부를 가로 질러 흘러가는 강 이름이다.
옛날에는 이 강을 단순히 회수(淮水)라고 했으며, 황하, 장강, 濟水와 함께 사대강에 속했다.
지금은 7대 강 중의 하나에 속한다.
이 강은 대략 북방의 황하와 남방의 장강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데, 이 강을 기준으로 남방과 북방을 구분한다.
속담에 온주의 밀감도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 강을 가리킨다.
거꾸로 하트 모양 같은 두 손, 뭘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처음 보는 대형 신발 매장.
먹자골목 역시 낮이나 밤이나 성업 중.
보행가.
청말 군정의 중책을 맡은 신하 이홍장.
이홍장이 살던 집은 자료 전시실로 바뀌어 있고.
안채.
이름이 복수당이다.
행복과 장수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소망이 담겨 있는 이름.
도자기에 그린 산수화.
역시 도자기에 그려진 화조도.
이홍장이 글씨도 잘 썼던 모양이다.
이홍장 휘호전.
정치하는 틈틈이 편액, 대련 등의 많은 붓글씨를 남겼는데, 그는 특히 행서에 뛰어났다고 했다.
그가 쓴 편액 이화당과 돈인당.
포용할 수 있는 덕성.
관용과 포용, 만인을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되고자 했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니 나 역시 올해의 주제어를 "寬容"(관용)으로 했었다.
그러나 관용의 덕을 체득하기가 너무 어렵다.
모든 사람의 온갖 행위를 포용하는 게 그리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우선 가족부터 조금씩 범위를 넓혀나가는 방법으로 단련해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자가 정말 단정하다.
이름 글자가 더욱 단아하게 느껴진다.
자손현족장대, 형제목가지비.
가훈으로 쓴 것이라 생각되는 대련.
형제가 화목한 집안의 풍성하며, 자손과 어진 종족들이 장차 크게 번창할 것이다.
가급인희순약류수, 시언락소목여청풍.
이층집.
그는 자강의 기치 아래, 양무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일환으로 민족경제를 부흥시키고자 노력했다. 그 한 예가 륜선초상국을 처음으로 만든 것인데, 이는 양무파의 첫번째 민족기업이 되는 셈이다.
그는 또한 부강한 국가 건설이란 이념 아래, 신식 학교도 창설하여, 중국의 근대교육 사업에 중요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침실 모습. 검은 칠이 되어 있는 옛날의 침대가 고풍스럽다.
먹이라고 하면 "휘묵"이라 하여, 안휘성 먹을 알아준다.
그래서 기념으로 하나 샀다.
앞에서 회하로보행가를 설명할 때 이야기한 것처럼, 안휘성 합비 주변을 회계라고 하는데, 이는 청말 이홍장의 등장으로 이곳 사람들이 하나의 영향력이 있는 정치적 집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붙인 이름이 아니라 바로 회계집단의 영수격인 이홍장이 직접 붙인 이름이다.
그는 고향 사람을 형제자매처럼 친하게 여긴다고 했다.
이 회계집단은 양무운동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약했었다.
이들은 정치, 외교, 문화 등의 방면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그렇게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특히 1901년 북경을 침공한 일본, 구미 등 8개국과 불평등한 조약인 신축조약을 맺은 장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에 대한 평가는 포폄이 뒤섞여 함께 존재한다.
이홍장 고거 관람을 마친 후 송나라 청렴판관인 포청천의 사당인 있다는 포공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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