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장 고거에서 나와 핸드폰의 바이두 지도를 보며 포공사로 향한다.
가는 도중 지하철 공사가 한창인 도로도 만난다.
주변에 몇 번인가 포공사 가는 길에 대해 물어봐도 다들 그 존재를 모른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곳인가 의아해하며 한참을 헤매다가 드디어 포공사를 발견했다.
포공사 가는 길의 가로수.
통일된 생김새가 신기하다.
포공사 바로 곁의 안휘성도서관.
드디어 발견한 반가운 포공사 표지판.
전체 연표는 50원, 포공사는 20원.
소요진공원에 있는 소요각이 목적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시간을 끌 수가 없어 포공사만 보기로 한다.
송나라 때 청렴한 관리, 포청천으로 유명한 포증(包拯)을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포공원이란 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름은 “포효숙공사(包孝肃公祠)”이다. “孝肃”이란 두 글자는 송나라 인종(仁宗)이 하사한 시호이다. 원래 건물은 명나라 홍치(弘治) 원년(1488)에 지어졌는데, 노주지부(庐州知府) 송감(宋鉴)이 이곳에 포공서원(包公书院)을 세운 바람에 이름을 포공사(包公祠)로 바꾸었다. 애석하게도 태평천국 시기에 전란으로 소실되었는데, 광서(光绪) 8년(1882)에 이홍장(李鸿章)이 사비를 갹출하여 다시 중건했다고 한다. 지금은 강가에 자리한 하나의 공원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
청렴정치 교육 기지라고 되어 있다.
사당 입구.
여기에도 향불은 예외가 없다.
사당의 정면 편액의 “색정망한(色正芒寒: 성품이 순수고결하고 정직함)”이란 글씨도 이홍장이 쓴 것이다.
강철 같은 얼굴의 그는 사사로운 인정에 이끌림이 없다.
포청천 집안의 가훈.
“後世子孙仕宦,有犯赃滥者,不得放归本家;亡殁之後,不得葬於大茔之中。不从吾志,非吾子孙。”(후세 자손들이 벼슬을 하면서 탐욕으로 수뢰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우리 집에 돌아올 수 없고, 죽은 후에도 선영에 묻힐 수가 없다. 내 뜻을 따르지 않으면 네 자손이 아니다.) 대단한 집안이다.
우리 나라 정치인, 공무원들도 모두 저런 자세로 자리에 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나마 나로 하여금 부질없는 희망을 품어 보게 하는 가훈이다. ㅠㅠ
사당 주변으로 대나무가 많은 것도 외압에 굴하지 않는 포청천의 강직한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
사당 주변에는 포증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장소도 있다.
먹으로 유명한 안휘성의 먹, 휘묵에 대한 소개도 있다.
포청천의 행적에 관련된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해놓은 곳도 있고.
역시 송나라 때 <몽계필담>을 쓴 심괄이 포증의 성품에 대해 찬양하고 있다.
유방정. 향기가 흐르는 정자.
의자로 쓰인 돌에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염천이란 샘, 우물.
지금도 안에 물이 있다.
옛날 한 관리가 이 물을 마시고 속이 아팠다고 하는데, 알고 보니 그 관리는 탐관이었다고 한다.
훗날 다른 청렴한 관리가 마시니 아픈 대신 몸이 좋았다고 하여, 청렴도를 가늠하는 우물이라는 뜻에서 염천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포공이 재판한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사람 크기의 밀랍인형으로 나타낸 곳.
드디어 안휘에서의 인연이 연결되려는 순간이다.
불의를 보면 임금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임금의 사돈까지 탄핵하는 강직한 성품의 포증.
송나라 인종이 귀비를 총애한 나머지 그의 친정아버지에게 많은 높은 관직을 겸직케 하자, 그는 여섯 차례나 탄핵하면서 사사로운 정에 끌려 국사를 보지 말 것을 임금에게 호소했다. 이에 인종은 결국 그의 말에 따라 두 개의 직책을 면하게 했다고 한다.
대단하다.
바로 우리 나라, 지금 이 시대에 저러한 관리가 진정 필요하다.
우리의 고관들은 불의와 정의가 행동의 원칙이 아니라, 윗사람 비위 맞추는 게 원칙이니 나라꼴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아~ 포증 같은 사람이 정부부서에 가득하다면 우리 나라가 어찌 정치 후진국이란 오명을 면하지 못하겠는가?
동찰.
동으로 만든 작두[작도].
죄인을 참수하는 데 사용된다고 한다.
모두 세 가지로, 용머리 작두는 죄를 지은 임금의 친인척 참수용, 호랑이머리 작두는 탐관오리 참수용, 개머리 작두는 지방의 악질토호 참수용이라고 한다. 1999년, 대만 사람들이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밀랍관을 관람할 무렵, 거기에서 혼자 여행 온 한 아가씨가 요란하게도 핸드폰으로 셀카 찍기를 시도하기에 내가 대신 찍어줄까 라고 물으니 흔쾌히 도움을 청한다. 그렇게 해서 이후 합비 시내를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이 함께 다녔다.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들었지만 두 사람이란 게 고독함을 덜어주는 잇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서로 행동을 맞춰야 하는 불편함이 더 크기 때문에 두세 시간의 함께함만으로도 충분하였다. 그녀는 안휘성 북부의 시골이 고향으로, 4남매 중 막내로, 올해 초부터 합비로 와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합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서 나를 잘 가이드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 한다. 포공사 부근에 청풍각이 있는데, 본래 한 공원 내에 같이 있는 줄 알았건만 서로 통하지 않게 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음 목적지인 소요진공원으로 가고자 하였고, 이에 그녀도 청풍각은 추후로 미루고 나와 함께 소요진 공원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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