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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4남순: 3. 광동성 혜주(惠州)...소동파(

by 유경재 2014. 2. 4.

중국최대의 문호를 동파(東坡) 소식(蘇軾1036-1101)이라고 한다 해도 부정할 사람이 그리 없을 것이다.

 

북송 시기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과 노선을 달리하는 바람에 좌천과 유배를 거듭하는 등 정치적으로는 크게 성공했다곤 하지 못하지만 학문이나 문학, 예술 등에서는 고대 중국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업적을 남겼다.

 

심지어 동파육(東坡肉)이란 절묘한 맛의 요리까지 현대인들에 남겨준 사람이니 그의 다재다능함을 더 말해 무엇하랴.

 

대표적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것으로는 적벽대전을 소재로 인생무상을 천의무봉의 필치로 그려낸 <적벽부>가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버지 소순과 아들 소철과 함께 3부자가 모두 당대와 송대 양대의 대표적 문장가 8인인 당송팔대가에 속해 있으니, 그의 재주는 한 집안의 것이었나 보다.

 

심지어 우리 신라시대 김부식의 아버지가 자신도 소순이 되고자 두 아들에게 각각 소식과 소철의 이름자를 넣어 김부식, 김부철로 지었다고 할 정도로 우리 나라 선비들에게 미친 영향력 또한 절대적이었다.

     

이러한 소식이 당시로는 중국 최남단에 속했을 광동성 혜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哲宗의 친정으로 인해 신당파가 재집정하게 되니, 그는 소성(绍圣) 원년10944월에 광동성영주(英州)로 폄적되는데, 미처 도착하기 전인 8월에 다시 이곳 혜주(惠州)로 폄적되게 된다. 그리하여 그와 혜주의 관계가 맺어지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특히 서호의 아름다움에 취해 밤을 세워 놀기도 했다 하며, 항주의 서호처럼 제방을 쌓아 백성들의 내왕을 편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지금의 "서호8" 중의 하나인 "소제완월"(蘇堤玩月)이 바로 그 흔적이다.

       

장주에서 5시쯤에 둥처 기차를 타고 다시 남으로 4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곳, 혜주남역.

 

 

 

전날 늦게 혜주에서 2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지인을 만나 간단히 회포를 풀고,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지인의 안내로 한 호텔 식당을 찾아 이른바 덴신(点心)을 맛보았다.

 

 

만두탕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듯.

 

 

호텔 식당.

아침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대부분 외부 손님]이 아침을 먹기 위해 이러한 식당을 찾는다고 한다.

북방과는 다른 광동성의 딤셤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부부, 친구, 지인, 사업관계자 등 구성도 다양하다. 

 

식사를 끝내고 인근의 한 재래시장을 구경하러 갔다.

그 지방의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 중에 하나가 시장이 아닐까.

 

 

 

매채, 메이차이. 우리의 시래기아 비슷한데 해주의 특산이라고 한다.

 

 

우와~뱀이다.

 

 

시장 골목 풍경.

 

 

몸에 좋다는 자라도 팔고.

 

 

시장구경을 마치고, 드디어 소동파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다는 서호를 찾았다.

날씨가 무척이도 맑고, 한겨울임에도 초여름을 방불케 하는 1월 중순의 어느 휴일에 혜주 서호를 찾게 되었다.

설날 등축제를 위해 지금 한창 설치 중이다.

서호의 출입문.

 

 

호수 중앙으로 난 길을 조금 걸어들어가자 그곳이 바로 옛날 송나라 때 동파 소식이 주민들을 내왕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제방이었다.

항주에서도 서호에 제방을 쌓아 지금도 "소제"(蘇堤)라 부르는데, 여기도 마찬가지다.

소제에서 달을 감상하는 것, 그것이 서호8경 중의 으뜸이란다.

 

 

지금쯤은 한창 불을 밝히고 있겠지.

 

 

남방이라 그런가, 아니면 올겨울에 예년겨울에 비해 특별히 따뜻해서 그런가 날씨가 덥다고 느낄 정도다.

길가의 꽃을 보니 내가 많이 남쪽으로 내려왔음을 느끼게 된다.

 

 

사주탑이 웅장하다.

 

 

사주탑. 본래 당나라 때 지어진 것으로, 소동파가 이 탑 이름을 "대성탑"이라고 했으며, 그의 시구에도 등장하는 탑인데, 명나라 때 무너졌다가 청나라 때 복원되어 지금 보호문물로 지정된 탑.

 

 

야자수.

줄기가 그야말로 강철 같다.

 

 

드디어 동파거사를 뵙게 된다.

 

 

매화꽃이 한창이다.

 

 

이 여자는 누구이던고?

분명 소동파와 관계가 있으렷다.

 

임어당(林语堂)소동파전(苏东坡传)의 언급된 것처럼, 소식이 혜주의 힘든 귀양살이에서 기꺼이 반려가 되 준 왕조운(王朝云)이란 애첩과의 사랑이 또한 유명하다.

 

왕자운은 본래 절강성 항주 사람으로 집안이 청빈하여 어려서부터 기녀의 길로 들었지만 성품만은 청신하고 고상하였다고 한다. 소식과는 신종(神宗) 희녕(熙宁) 41071에 소식이 항주통판(杭州通判)으로 폄적되었을 때 처음 만났으며, 그녀에게 ᄇᆞᆫ해 첩으로 맞아 총애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식의 저명한 시 음호상초청후우(饮湖上初晴后雨)(서호에서 술을 마시는데 맑았던 날이 비가 내리네)에서 서호를 화장한 여인으로 비유했었는데, 아마도 그녀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소식은 항주에 4년 있은 후로 밀주(密州)서주(徐州)호주(湖州) 등지로 이어가며 폄적생활을 계속했는데, 이 기간에 조운 그녀는 항상 소식을 따라다니며 고생스런 귀양생활의 위안이 되어 주었다. 심지어 소식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라고 할 정도였으니.(知我者唯有朝云也)

 

조운이 소식과 함께 혜주에 왔을 때의 나이는 겨우 30세 초반이었는데, 당시 소식은 이미 환갑의 나이의 였었다. 그런데 당시 여러 처첩들은 소식의 나이와 당시 정국을 감안하다 보니 모두 소식의 곁을 떠났으나 오직 조운만이 시종일관 그를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렇게 소식의 반 나이밖에 안된 훨씬 젊은 그녀가 오히려 병을 얻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그들의 사랑, 특히 조운은 얼마나 안타까운 사랑이었던가.

 

왕조운의 상.

 

 

 

나이가 갑절이나 연상인 사람을 평생 모시다가 오히려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하얀 매화 꽃떨기가 마치 조운의 청순지고한 사랑의 환영 같이 보인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이해했다니.

 

 

사랑했던 두 사람.

 

 

 

 

홍콩의 국화, 아니지 지금은 중국에 귀속되었으니 홍콩의 시화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이 꽃은

자형화(紫荆花)

 

 

 

요렇게 생겼다.

 

 

요즘은 서호 가운데로 다리가 놓여 있다.

 

 

구굑고라는 이름의 다리.

아홉번 좌우로 꺾인다는 말인가.

예전 소주의 졸정원의 이런 다리를 지날 때 가이드가 하는 말, 강시 귀신은 직진밖에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쫓아오는 귀신을 따돌리기 위해서 지그재그로 다리를 만들었다고.

설마?

다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좌우로 돌릴 수 있게 한 것이리라.

 

 

 

구곡이란 말에 혹시 구비를 세는 것은 아닌지.

구란 말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황하구곡처럼.

 

 

서호 한 켠에는 도교 사원도 있다.

 

원묘관이라는 도교 사원.

 

 

노자이신가?

 

 

제단에 바칠 제수들을 준비하는 중.

 

 

 

지전도 태우고.

 

 

 

서호 구경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한국인들이 많이 산다는 곳으로 이동 중, 잠시 시내 보행가도 구경해 보고.

 

 

한국식당으로 들어간다.

옆에는 한국마트도 있다.

 

 

가격이 상해의 한국식당에 비해 어떤가.

좀 싼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

 

 

 

 

 

어쨌거나 뜻하지 않게 이런 외지에서 한 상 그득하게 한국음식을 먹게 되어 여정의 피로가 싹 가신다.

 

 

식사를 마치고 다음 여행지인 동관(東菅)으로 향하는 중, 루오푸산(罗浮山) 관광지를 찾았다.

최근에 국가로부터 5A급으로 인정받았다고 하는 곳으로, 도교사원과 불교사찰이 있는 산이다.

 

 

먼저 도교사원.

 

이런 향도 있구나.

 

역시 도교사원.

도교사원 구경을 마치고 인근의 절에도 갔다가 어둡기 전에 도착하기 위 길을 재촉하여 동관으로 향한다.

 

 

출처 : 한국교통대학교 중국어과 수업자료실
글쓴이 : 유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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