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본능

[중국여행][심양여행] 동북대학, 심양건축대학 1

by 유경재 2012. 7. 14.

하얼빈공항에서 새벽같이 날아서 심양에 도착,

아침도 먹지 못한 상태라 배가 많이 고프다.

그러나 빡빡한 일정 때문에 아침 먹을 시간도 없다.

도착하니 마침 MOU체결할 중국의 한국기업 대표단이 마중을 나왔다.

그리고 우리가 아침을 먹지 못했음을 알고서 미리 햄버거 하나씩을 준비해왔다.

허기진 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지만  정말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다.

 

심양공항.

 

공항에서 동북대학교 국제교류부의 선도차량을 따라 러시아워의 심양시 교통을 체험하면서 심양의 첫 목적지인 동북대학교에 도착했다.

학교 이름 끝자락에 새겨진 장학량이란 이름은? 설마 서안사변의 그 장학량?

 

심양은 도시 전체가 건설 중이다.

도시뿐만 아니라 학교도 마찬가지다.

5년 쯤 후의 확 달라진 심양의 모습이 기대된다.

 

MOU체결을 마치고, 이어서 학교기념관에서 학교에 대한 소개를 받는다.

학교소개를 맡은 이.

 

동북대학교 교가의 작곡가와 작사자.

작곡은 조원임(趙元任), 작사는 유반농(劉半農).

둘 다 1900년 초 유럽에 유학을 했던 신중국의 선구자들이다.

특히 유반농은 신시 개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그는 정형시의 틀에 갖혀 있던 구체시를 형식은 물론, 내용에 있어서도 사회성을 담도록 개혁하기를 주장한 시인이다.

참고 삼아 그의 대표시 두 수 정도를 감상해 본다.

 

<종이 한 장 사이>
방안에 난롯불이 지펴져 있는데
할아범이 창문 열고 과일 사 오라고 시키면서 말하길,
"날씨도 안추운데 불이 너무 뜨겁구나.
나를 구워 죽일 셈이더냐!"
방 바깥에는 거지 하나가 드러누운 채
이를 꽉 깨물고 북풍을 향해 고함친다. "사람 죽어요!"
가련하게도 집 바깥과 집 안은
단지 얇은 종이 한 장이 있을 뿐!

<사랑노래>
하늘에는 옅은 구름이 흩어져 있고
땅에는 산들바람이 불어오누나.
아!
산들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날리는데
어찌하면 그녀를 잊을 수 있을꺼나?

달빛은 바다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바다는 달빛에게 사랑을 속삭이누나.
아!
꿀 같은 이 은빛 밤이여,
어찌하면 그녀를 잊을 수 있을꺼나?

물 위로는 떨어진 꽃잎이 천천히 흘러가고
물 바닥엔 고기들이 천천히 헤엄치누나.
아!
제비야 너는 무슨 말을 하고 있니?
어찌하면 그녀를 잊을 수 있을꺼나?

고목은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고
들불은 저녁빛 속에서 타누나.
아!
서쪽 하늘에 아직도 남아있는 저녁놀이여,
어찌하면 그녀를 잊을 수 있을꺼나?

 

두번째 시의 그녀는 함께 유학했던 친구 조원임의 말에 의하면 조국, 중국을 의미한다고 한다.

유반농은 특히 중국어 3인칭 여자를 뜻하는 "她"(타)자를 고안해낸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서안사변에 대해 소개한다.

그렇다면 정문의 그 이름, 장학량이 바로 서안사변의 장학량이란 말인 모양이다.

동북대학교 3대 총장을 역임했었다고 한다.

역사가 유구하며 대단한 학교다.

 

잠시 장학량과 서안사변에 대해 살펴보자.

 

장학량(張學良1901-2001)은 중국의 군벌 정치가이다. 요녕성 출신이며, 1936년 12월 12일 서안(西安)에서 장개석(蔣介石)을 강금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요구한 서안사건을 주도하였다.

 

아버지 장작림(張作霖)은 봉천군벌의 수장이었으며 친일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1928년 6월 7일 일본 관동군 소속의 고모토 다이사쿠에 의해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측이 여성편력과 아편중독이 심한 것으로 알려진 장남 장학량이 일본의 중국내 영향력 행사에 이용하기 더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은 장학량은 이를 극복해 내었고, 그가 이끌게 된 봉계군벌은 항일 성향으로 전환하였다.

 

1936년, 그때까지 침입해오는 일본군에 항전하는 것보다 오히려 모택동의 공산당 토벌에 더 열을 올리기 있던 국민당의 장개석에게 선항일, 후통일이라는 명분으로 공산당과의 연합, 합작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서안을 방문한 장개석을 지금의 화청지 부근에다 감금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요구한 서안사건을 주도하여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킨다. 이 사건으로 10년간의 징역형을 받아 감금되었고, 출감 후 1949년에 대만으로 끌려가서 국민당 정권에 의해서 1991년까지 자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장개석 사후 1993년에 처음으로 대만에서의 출국이 허용되어 미국으로 떠났으며, 1995년부터 2001년 사망할 때까지 하와이에 거주하였다. 2001년 10월 14일 오후 8시 50분, 미국 하와이 자택에서 103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마감했다.

 

전 국가주석이었던 쟝쩌민, 강택민도 다녀갔던 흔적을 남겨놓았다.

성과와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을 위해 복무하라.

 

올림픽 최초로 메달을 딴 사람도 동북대학 학생이었다고 한다.

학교를 자랑할 만도 하다.

 

학교 심벌.

 

바로 이 사람이 제3대 총장이자, 서안사변의 주역이었던 장학량.

 

"한경"은 장학량의 호인듯.

그의 호를 딴 건물. 

 

동북대학교 방문을 마치고 학교를 빠져 나와 인근 식당에서

양교의 대표자들이 모여 식사를 하면서 교류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 동북대학교 총장은 얼마 전에 무한대학교에서 왔다고 하는데, 많이 점잖다.

식사를 마치고 동북대학교 대표단과 헤어진 후,

우리는 따로 동북대학교 학교기업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는 심양건축대학교를 찾아갔다.

 

심양건축대학 본관 앞에 심어진 파초에 보기 드문 꽃이 피어있다.

 

 

벼루 아닌가? 엄청 크다.

 

우리 부서와 같은 국제교류합작처.

 

MOU체결이 거행되는 곳.

 

동북대학교의 주도면밀한 손님맞이에 비해 모든 게 서투르다.

즉흥적이고 실수 투성이다.

표정들도 그다지 반기지 않는 듯 무뚝뚝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저와 같은 서투름과 순수함, 무뚝뚝함 속에 어쩌면

순박한 정이 감춰져 있을 것이란 것을...

 

협정을 체결한 후 곧바로 학교 투어.

이곳저곳, 그러나 핵심은 다 둘러본다.

옛날 궁전의 한 건물이었던 것을 그대로 옮겨와 재현해놓았다고 한다.

팔왕서원.

 

 

학교투어는 계속된다.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