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由敬管見

♣행운에 대하여

by 유경재 2011. 6. 23.

우리는 일상에서 “운이 좋다”, “운이 좋지 않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운이 좋다는 말은 능력이나 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결과가 좋게 나타났다는 뜻일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가 운이 나쁜 경우, 즉 불운을 의미할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학생의 경우, 시험성적을 예로 들 수 있겠는데, 어떤 학생은 별로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성적이 좋게 나온 경우가 있을 것이고, 어떤 학생은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성적이 좋지 않게 나온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린 종종 운이라고 말하곤 한다.


스포츠의 경우, 축구시합을 예로 들면, 90분 내내 우세한 실력으로 공세를 펼치던 팀이 끝내 어이없는 자책골 하나로 패배하는 경우도 있겠고, 반대로 경기 내내 수세에 몰리던 약체로 보이던 팀이 상대팀의 결정적인 실책으로 인해 이기는 경우도 있겠다. 이런 경우 역시 우린 종종 운을 떠올린다.

 

좀더 범위를 넓혀 인생 전체의 성공 여부 역시 예로 들 수도 있겠는데, 즉 어떤 사람은 평생토록 남들에 비해 열심히 노력하였건만 늘 실패의 연속이요, 반대로 어떤 사람은 별로 노력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는 일마다 잘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다. 이런 경우를 직면하면 대개는 역시 운수를 들먹이게 마련이다.


어디 그뿐인가. 범위를 한 나라의 흥망까지 넓혀보면, 여러 열강이 대결하던 정국에서 작은 약소국이 때로는 큰 강대국을 이길 수도 있는 역사가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의 역사를 통해 적잖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경우 역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대개는 운을 통해 해석해버리려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 대부분은 일상의 주변에서 운이 작용하는 듯한 일을 자주 접하고 있으며, 대부분은 운의 작용을 수긍하는 편이다.


그러나 옛 성현들, 공자나 노자 등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존재를 영위하는 우주의 질서, 즉 天(道)의 완벽성을 이야기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말로는 《明心寶鑑》 서두를 장식하는 말로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복으로써 보답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화로써 보답한다.’”(子曰, 爲善者, 天報之以福, 爲不善者, 天報之以禍.)1)라는 것과, 노자의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서 성긴 듯 하지만 놓치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疏而不失.)(《道德經》제73장)라는 말이 될 것이다. 후자를 부연하면 인간사를 보면 열심히 하는 사람도 화를 입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복을 받기도 하는 등 하늘의 이치는 엉성하기 짝이 없는 듯 보이지만 실재로는 하늘 아래 있는 그 어떤 존재도 그 이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러한 하늘의 이치, 기독교의 입장에서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이와 같이 한 치의 오차가 있을 수 없는 법이니, 이를 믿는다면 행운이란 것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행운은 결국 당사자의 자질 · 재능 · 노력 여부 등과는 무관한 것이 아니란 말이 될 것이며, 당사자가 가진 모든 것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성현들의 말을 믿으며,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앞에 언급했던 운과 관련된 예를 다시 설명한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성적 잘 받은 사람도 결국에는 남들이 보기에는 공부를 안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고, 실재 자신은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공부의 방법이 다른 사람보다 더 요령있고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 즉 공부를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나쁘게 나온 경우, 역시 자신은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남들에 비하면 적게 하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공부의 방법이 시간과 노력만 많이 든 비효율적인 것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설명해간다면 축구 경기 역시 불운한 팀은 결국 연습부족이나 작전 실패 등의 원인 때문에 골 결정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운이 아니다. 운 좋게 이긴 팀 역시 비록 수세에 몰렸지만 실점하지 않고 이긴 것은 수비에 뛰어났고, 나름대로 이기는 법을 알았던 것으로, 역시 운과는 별개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열심히 사는 불운한 인생도 정말 객관적으로 그 삶을 해부해본다면, 잘못된 계획, 무모함, 욕심 등 허점이 많은 인생일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인생 또한 객관적으로 전자와 비교해보면 전자와 반대되는 뭔가 뚜렷하게 우위를 보이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이치는 나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때문에 세상에, 하늘 아래 이런 이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는 성현들이 이미 오래 전에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이치를 의심하는 것은 인과의 관계를 피상적으로만 보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 세상에는 결코 행운이란 게 없다. 모든 것은 철저한 인과관계 속에서 진행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 모두는 이런 진리를 확신하고, 그 확신을 바탕으로 삼아 자신의 인생을 결코 자신의 의지의 범위를 넘은 하늘의 행운과 불행이란 것에 의존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행운이란 아웃풋[결과]을 얻기 위해서는 행운을 얻기 위한 인풋[노력]이 필수전제가 된다고 하겠다.


1) 이 말은 본래 《荀子 · 宥坐》에 나오는 말인데, 공자 일행이 남쪽 楚나라로 가다가 진채 중간에서 고생할 때, 제자 자로가 한 말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 말도 역시 당시에 이미 전해오던 격언으로 보인다. “子路進而問之曰, “由聞之, ‘為善者天報之以福,為不善者天報之以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