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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남방명루기행] 무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9: 중국현대사의 첫 페이지 신해혁명박물관-2

by 유경재 2014. 5. 12.

전편에 이어 조금 신해혁명으로 가는 과정을 좀 더 보기로 한다.

보다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분산된 조직보다는 통일된 조직이 필요하다. 

손문이 중심이 되어 조직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새로이 중국동맹회를 결성한다.

 

각 조직들이 손문 휘하의 중국동맹회로 속속 들어온다.

 

중국동맹회 기념사진.

 

조직이 통일되자 본격적으로 무장 혁명이 시작된다.

 

중국동맹회 성립 후 있었던 각 지역의 무장혁명.

 

드디어 신해혁명의 날이 밝아온다.

청나라 말, 장지동이 호북의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무한을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시켰다.

그것이 결국 혁명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장지동은 하북성 사람이다. 그는 청말 양무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중국근대공업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장지동이 정사를 잘 펼친 무창[지금의 무한]과 혁명성공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혁명을 위한 사상적 측면[교육제도가 잘 되어 있음], 경제적[공업의 발달], 군사적[무기 수급이 용이] 등등이 다른 지역에 비해 우월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장지동 초상화.

 

신해년 5월, 그동안 민간이 맡아서 건설해오던 철도건설사업을 청 정부가 열강들에게 넘긴다는 정보를 듣고, 전국 각지의 철도 노동자들이 철로를 보위하는 운동이 전개된다. 이 운동은 파업, 철시 등으로 이어지고, 최종적으로 무장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중에서 사천성 성도의 철로보위 운동이 관군에 의해 피를 부르게 되자, 격분한 성도의 혁명군이 각 지역에서 기의하게 된다.

이것이 곧바로 무창의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된 셈이다.

 

 

신해혁명 전야인 10월 9일, 무창의 보선리에서 폭탄을 제조하다가 실수하여 터지는 바람에 관군에게 적발되어 40여 명이 체포되었고, 다음날 새벽에 팽초번 등 세 지도자가 처형된다. 이들 세 사람을 훗날 "수의3열사"라고 부른다.

 

 

혁명을 알리는 첫발의 총성은 10월 10일 저녁 8시 경에 울렸다.

 

 

무창성을 점령하고 혁명의 승리를 알리다.

 

관군은 완강하게 대항하다가 결국 패주하게 된다.

오른쪽 사진은 청나라 관리들이 도망가기 위해 기차를 타려고 하는 중.

 

무창 점령 다음날 곧바로 무창에 악군도독부를 설치하고 여원홍이 초대 도독으로 추대되었다.

악군도독부는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정인 셈이다.

 

악군도독부의 정부 기구표.

 

여원홍. 호북 황피 사람.

 

악군도독부 모습 재현도.

 

악군도독부의 법령도 제정했다.

 

양하보위전. 신해혁명 전쟁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전쟁으로, 이 전쟁을 통해 각 지역의 혁명의 불길이 순식간에 번져나가게 된다.

 

청군의 모습.

 

양하보위전의 서막인 유가묘대첩.

 

전쟁 장면을 재현해놓은 조형물.

 

청군 정찰병의 실제 모습 사진.

 

 

무창기의, 무창수의, 신해혁명 등으로 불리는 무한에서의 혁명의 승리에 전 중국의 각지는 연이어 화답하듯 승리를 가져온다.

이에 1912년 1월 1일, 손문은 남경에서 중화민국남경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 중화민국임시약법을 제정하여 신해혁명을 마무리한다.

 

전국 각지에서 혁명의 승리를 거둔다.

 

중국 근현대사의 일단락의 막이 신해혁명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인증샷, 찰칵.

 

중화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중화민국임시정부 초대 총통인 손문의 글씨.

함께 번영하자.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데, 비는 조금씩 그치가고 있다.

비 그치는 끝에 안개가 피어오른다.

 

손문의 총통 취임식.

 

 

지금도 남경에 가면 볼 수 있는 중화민국임시정부 건물의 총통 집무실.

 

세상은 지배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다.

 

이런 마당에 청나라 왕실의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지막 황제 부의는 쓸쓸히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진다.

 

아쉬움이랄까? 우리 나라의 현대사를 생각해보고, 또 지금의 우리 나라를 생각해보면서 못내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다시 한 번 돌아다 본다. 중국현대사가 걸어온 길을...

 

황금 용상에 앉으면 어찌 내려오고 싶으랴.

 

중화민국임시약법 반포.

 

 

손문은 글씨.

잘 쓴 글씨라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내용이 좋고, 쓴 사람이 대단하기에 필체마저 대단해 보인다.

 

수의광장 끝자락의 혁명상징 조형물.

 

건너편은 옛날 신해혁명기념관이다.

 

이후 원세계를 통해 다시 봉건주의가 잠시 부활했지만 이내 사라진다.

당시 손문은 일본에서 중국으로 돌아와 전당강의 역류를 바라보면서 "세계적 민주의 흐름은 도도하기 거침이 없는데, 이를 따르게 되면 창성하게 되고, 이를 역행하게 되면 망하게 된다"라는 글을 남겼다.

 

신해혁명 이후 현재까지의 역사를 슬라이드처럼 보여주는 전시관.

 

후일 손문의 뒤를 이은 국민당의 장개석이 모택동의 공산당에게 패해 대만으로 가서 중화민국을 세웠으니, 그들의 국경일은 당연히 신해혁명 기념일인 10월 10일이 되는 것이다.

 

2012년의 사진.

박물관이 2년 전에 신축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