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여행 둘째날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국에서의 최종 흔적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위치는 해방비에서 도보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정식 명칭은 충칭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진열관.
임시정부가 일본군을 피해서 내륙으로 들어와 최종적으로 중경의 이 곳에 자리를 잡았었다고 한다.
거의 다 와가는 모양이다.
큐알코드를 스캔하면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즉 3.1운동 직후 중국의 상해에서 수립되어 이후 일제의 추격을 피해 항주, 남경, 장사, 광주를 거쳐 1939년 3월에는 유주로 갔다가 1940년 9월에 최종적으로 중경의 이곳에 자리를 잡았으며, 이후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임시정부는 중경에서도 양류가, 석판가, 오사야항 등으로 옮겨다니다가 최후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주소는 유중구 칠성강 연화지 38호이며 여기에서 광복을 맞았다.
드디어 도착했다.
계단식으로 된 몇 개의 건물들이 중앙통로계단 좌우로 자리하고 있으며, 각 건물마다 임시정부 관련 다양한 시청각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직원들도 친절하고 주변환경도 깨끗하다.
상해임시정부 기념관보다 더 관리가 잘 되고 있는 느낌이다
입장료는 무료.
자료 전시관은 1호 건물부터 최종 5호 건물까지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관람 가능 시간은 대부분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월요일은 폐관되며,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오후 4시반 이후는 입장 불가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징과도 같은 태극기와 김구 선생의 동상.
일본에 대해서 중국은 한국과 운명공동체였다는 표현.
3.1운동 직후 수립되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절강성, 호남성, 광동성 등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중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망명정부였던 임시정부를 위해 힘썼던 애국선조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반포한 독립선언서.
1920년 1월 1일 임시정부 요인 신년하례식.
윤봉길 의사 의거 관련 자료 사진.
당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 그리고 우리들이 있을 수 있겠지요.
한인애국단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7일 김구 주석과 함께 기념 사진을 남기고, 이틀 후인 4월 29일 홍구공원[지금은 노신공원으로 이름이 바뀜]에서 일왕 생일 기념식에 잠입하여 단상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정 요인 다수를 사상시켰으며, 즉석에서 체포된 윤 의사는 그해 12월 일본에서 순사하였다.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임시학생여권.
임시정부 1호 포고문.
1차세계대전 종전 후 파리강화회의의 각국 대표단에게 전달된 한국독립승인서 및 각서.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외교선전용 책자.
독립신문 창간호(상해판).
임시정부 국무원의 제1호 공보.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위해 발행했던 공채.
윤봉길 의사가 투척했던 도시락 폭탄.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태극깃발 높이 드날리며 대한민국을 위한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일본군정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설립된 한인애국단(단장: 김구, 단원: 윤봉길, 최흥식, 이봉창, 유상근, 이성원, 이성발 등).
한인애국단 선언서: 우리는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싸우고자 한다. 한국의 독립이 성공하는 그날까지 이런 폭렬한 행동은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인애국단원 이봉창 의사. 1932년 1월 8일 일본의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는 히로히토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신년 관병식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비록 천황 암살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대한독립의 의지를 적국의 심장에서 드높여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 직후 현장 모습.
임시정부의 이동 경로.
상해-절강성(항주-가흥)-강소성(진강)-호남성(장사)-광동성(광주)-광서장족자치구(유주)-중경
임시정부 각 지역별 체제 기간.
임시정부 중경청사의 옛날 모습.
호남성 장사에서 거행된 삼일운동 19주년 기념식 모습.
절강성 가흥 시기 사진.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1940년 한국독립당 기념 사진.
1940년 중경에서 창립된 한국혁명여성동맹.
광복 후 한국독립당 기념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법 초안.
한국국민당 기관지 <한민> 창간호.
한국독립당 창당 선언문.
한글한자 병용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조선민족혁명당의 강령 등.
당시에도 여러 개 정당이 있었으며, 혁명이란 어휘가 애용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자료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다 보니 관람 시간이 꽤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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