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胡适)의 천고의 탄식
… 역사의 갈림길에서 떠나느냐 남느냐의 선택이 그들 인생의 심각한 분기점이 되다
필자: 사상(史翔) 【明慧网2020년 8월 16일】
역사에는 가정이란 없고 오직 결과만 있다
오늘날 70년 전 장개석(蔣介石)의 ‘창구학인계획(搶救學人計劃 학자구원계획)’을 돌아보면 확실히 중공이란 호랑이 입속에서 ‘사람을 빼앗은(搶人 역주: 중공의 마수에서 구원했다는 의미)’ 것이다. 대륙이 중공에 함락되기 직전 대륙을 탈출한 호적(胡適 후스), 부사년(傅斯年 푸스녠), 전목(錢穆 첸무) 등의 지식인들은 자유사회에서 자유로운 사상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대륙에 남았던 걸출한 지식인들은 반우파(反右)운동과 문화혁명 기간에 거의 모두 참혹한 박해를 받았고 환상이 깨지면서 악몽만이 남았다.
당시 역사를 돌아보면 1948년 11월 회해전역(淮海戰役 역주: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사이의 대규모 전투. 이 전투에 패한 국민당이 북경을 포기하면서 대륙은 중공이 차지하게 된다)이 시작되면서 장개석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즉시 ‘창구학인계획’에 착수했다. 당시 구원 명단에 올라간 이들은 모두 대륙에서 탁월한 성취를 보인 뛰어난 지식인들이었다. 당시 그들 중 대다수는 이것이 목숨을 살릴 최후의 기회였음을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북경대학 교수를 지낸 계선림(季羨林)의 회고에 따르면 장개석은 3대의 비행기를 보내 북평(北平 지금의 북경)의 저명한 학자들을 남경을 거쳐 대만으로 모셔가려 했다. 북경대학 교수 출신의 호적이 직접 남경 비행장에 마중을 나갔다. 첫 번째 비행기가 도착한 후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두 번째 비행기 역시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었다. … 호적은 혼자 비행장에서 펑펑 울었다. 호적의 울음은 진실로 천고(千古)의 통곡이자 천고의 탄식이었다. 이후 역사적인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그의 이 통곡과 탄식은 결코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암암리에 호적은 아마 이미 이들 지식인들의 운명을 예측했었던 것이다.
당시 구원명단에는 곽말약(郭沫若 궈모뤄)을 포함해 81명의 원사(院士)가 있었는데, 그중 59명이 잔류를 선택했고 오직 22명만이 대륙을 탈출했다. 그중 10명은 대만으로 갔고 나머지는 미국이나 유럽 등으로 떠났다. 1949년은 그들의 인생계획에서 아주 중요한 경계선이 되었다.
호적: 공산당의 모든 수법을 믿지 말라!
호적은 중국 정계와 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에 장개석이 직접 전보를 보내 남경으로 날아오도록 독촉했다. 중공 역시 그에 대한 통일전선(統一戰線) 공작을 강화했다. 당시 모택동은 호적에게 구두로 “호적이 떠나지만 않는다면 그에게 북경도서관 관장을 맡기겠다!”로 말했다고 한다. 일찍이 교수직을 버리고 청화원(清華園 청화대학)을 나와 비밀리에 공산당 점령지역에 잠입해 중공 고위직이 되길 기다리던 오함(吳晗)은 원래 호적이 아끼던 제자였다. 그는 직계 가족을 보내 호적과 밀담을 갖고 북경대학에 남고 국민당을 따라가지 말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호적은 이 말을 들은 후 싸늘하게 “공산당의 모든 수법은 믿지 말라!”고 한마디 했다. 그러면서 오함에게 “소련은 빵은 있지만 자유가 없고 미국은 빵도 있고 자유도 있지만 그들(역주: 중국공산당)이 오면 빵도 없고 자유도 없을 것이다.”라는 세 마디를 전하게 했다.
공산당 고위층이 포기하지 않고 직접 호적에게 투항을 권했지만 호적은 단호히 공산당을 따르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일찍이 1919년부터 호적은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전파되는 것을 반대했으며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는 자신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잠꼬대”이며 “공산주의는 완전히 독단적인(武斷) 사상”이라고 보았다.
1946년, 호적은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정당’이라는 글을 써서 세계에는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정당이 있다고 말했다. 즉 하나는 영국, 미국, 서구의 정당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의 공산당,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 독일의 나치당이라고 하였다. 글에서 호적은 분명하게 두 정당의 서로 다른 성격을 열거하고, 그들은 자유와 비자유, 독립과 비독립, 용인과 비용인의 구분이 있다고 밝혔다.
1949년 5월, 이미 중공에 투항했던 당시 북경 보인(輔仁)대학 총장이자 개인적으로 호적과 가까웠던 진원(陳垣)이 ‘호적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발표해 “현실을 똑바로 보고 마땅히 인민을 향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호적이 한때 진원에게 함께 대륙을 떠나자고 권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순진하게도 “북평[북경]이 해방되기 전날 남경 정부에서 여러 차례 비행기로 맞이하러 왔다. 내 생각에 당신과 진인각(陳寅恪 천인커) 선생은 비록 이미 떠났지만, 청년 학생들은 오히려 행동으로 내게 그들은 광명을 기다리며 새로운 사회를 맞이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새로운 힘이 이미 성장했음을 알고 있다.”라고 믿었다.
호적은 이런 진원의 선택에 대해 “몹시 가련하고 애석하다”고 했다. 이듬해 ‘공산당 통치하에서 결코 자유란 없다’는 글로 대답했다. 아울러 이 편지를 가리켜 “공산당 통치하에서는 결코 학술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가장 잘 증명한다”고 했다.
부사년(傅斯年): 연안에 가서 오히려 공산당의 본질을 간파하다
부사년(傅斯年)은 20세기 중국 사학과 국학계(國學界)에서 그 누구 못잖은 천재이자 기재(奇才)로 대사(大師)급 인물이다. 그는 지식인 중에서는 아주 드물게 성격이 강렬해서 악을 원수처럼 미워했다.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부대포(傅大炮)’라 부를 정도였다.
부사년 역시 줄곧 소련과 중공에게 호감이 없었다. 1932년 그가 발표한 ‘중국은 지금 정부가 필요하다’는 문장에서 공개적으로 공산당에 대해 “대체적으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구(流寇 떠돌이 도적)”이라고 불렀다. 그는 많은 청년들이 점차적으로 격렬한 좌파분자로 변하는 것을 보고 몹시 불안해했다. 그는 일찍이 “내가 만약 17, 8세 청년이라면 나 역시 공산당에 대해 흥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산당과 접촉한 후에는 절대로 공산당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항일전쟁 후기인 1945년 7월 1일, 부사년은 황염배(黃炎培), 장백균(章伯鈞) 등과 연안(延安)에 간 적이 있다. 부사년은 또 어느 날 밤 모택동과 단독으로 늦게까지 담화를 나눴다. 연안 여행에 대해 ‘마치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듯’ 했다고 한 황염배와는 달리 부사년은 연안의 작풍이 순전히 어리석은 국민들을 마음대로 통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모택동과 대화하는 과정 중에 모택동이 항간의 각종 소설 심지어 저급한 소설까지 숙지하고 있으면서 이런 자료를 통해 민중의 심리를 연구하고 이용하려는 것을 발견했다. 때문에 부사년은 모택동은 단지 수호지의 송강(宋江)과 같은 무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바로 공산주의와 공산당에 대한 이런 편견없는 정확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부사년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대륙을 떠나기로 결정했고 후에 국립대만대학 총장이 되었다.
전목(錢穆): 모택동의 남하 포고문에서 천기(天機)를 읽다
사학(史學)에 조예가 깊었던 전목은 진인각(陳寅恪), 여사면(呂思勉 뤼쓰몐), 진원 등과 더불어 소위 ‘현대 4대 역사학자’로 꼽힌다. 전목(錢穆) 역시 공산당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지녔던 또 다른 민국 시기의 대사이다.
1949년 중공군이 장강을 건너 강남으로 진격했다. 지식인들은 떠날지 남을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저명한 고전문학연구자 전기박(錢基博 첸지보)이 전목더러 남으라고 권유하자 전목이 물었다.
“당신은 고문을 연구했다는데, 군대가 도강할 때 그 포고문을 보았습니까? 거기에 큰 도량으로 포용하는 기상이 있던가요?”
그러자 전기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 포고문은 바로 모택동이 직접 쓴 것이다. 전목은 이 포고문에서 난세의 효웅(梟雄)에게 만물을 포용하는 기상이 없음을 읽어냈고 역사학자인 자신이 용납될 수 없으리라 여겼다. 때문에 그는 바로 홍콩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전기박은 중공의 말을 믿고 대륙에 남았다. 이후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다. 전목은 홍콩에서 서원(書院)을 설립해 많은 인재들을 양성했으며 그의 제자들이 천하에 가득하다. 하지만 전기박이 심혈을 기울인 원고들은 1959년 ‘백기 솎아내기(拔白旗: 1958년 대약진운동 중 자산계급 학자들을 백기로 간주 비판 처단한 것)’운동 때 대량으로 소각되었고 결국은 우울하게 사망했다. 전목의 뛰어난 통찰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중공은 전목과 같은 대사(大師)에 대해 통일전선 공작을 잊지 않았다. 1950년대 초, 중공은 전목의 스승 여사면(呂思勉)과 그의 조카 전위장(錢偉長 첸웨이장)을 시켜 그에게 대륙으로 돌아오도록 권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하지만 전목은 답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풍우란(馮友蘭 펑여우란), 주광잠(朱光潛 주광첸) 두 친구를 보니 지식인 사상개조 운동 때 압박에 의해 자신을 추악하게(醜化) 하는 반성문을 써야 했다. 그렇다면 걸어다니는 시체(行屍走肉)나 다름이 없고 인간의 존엄을 상실한 것이다. 이는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명나라 말기 주순수(朱舜水)가 일본에 머물며 중국문화를 전파한 것을 본받아 동남아 국가에서 중국문화의 일맥(一脈)을 전하려 한다.”
동시에 전목은 계속해서 책을 쓰고 문장을 발표해 도리에 맞지 않은 중공 정권의 각종 조치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중국사상사(中國思想史)’에서 이렇게 썼다.
“지금 중국에서 만연하고 창궐한 공산주의는 기껏해야 뼈가 있고 혈육(血肉)이 있는 살아있는 송장에 불과하다,”
“대륙정권은 마치 하나의 큰 돌과 같아서, 아주 높은 산 위에서 아래로 굴릴 때, 붕괴가 가까워질수록 그 힘이 더욱 커진다.”
“삼면홍기(三面紅旗)는 얼마나 무섭고 홍위병(紅衛兵)의 문화대혁명은 얼마나 무서웠던가? 다음에는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보면, 전목이 뜨겁게 사랑한 것은 문화적인 의미에서의 중국일 뿐, 문화를 훼멸하고, 인성을 왜곡한 중공 정권에 대해서는 일말의 환상도 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진인각(陳寅恪): 황당무계한 문화대혁명을 예견하다
‘교수 중의 교수’로 불린 국학대사(國學大師) 진인각(陳寅恪)은 해박한 지식에 20여 종의 언어에 통달해 양계초(梁啓超), 왕국유(王國維)와 함께 ‘청화삼거두(淸華三巨頭 역주: 청화대학 초기 국학연구원에 초빙된 3대 학자)’로 불렸다.
1965년, 굶어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던 대기근에서 이제 막 벗어난 중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당국이 백성들을 쉬게 해줄 거라고 축하했다. 이렇게 태평한 몇 년이 지났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발생했으니, 모택동의 이데올로기가 날로 팽창해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조용히 다가왔다. 뭔가를 예감한 진인각은 이미 위태로워진 정세에 대한 근심으로 마음이 타들어갔다. 그는 1966년 ‘병오원단작(丙午元旦作 병오년 새해 첫날에 쓰다)’에서 이런 구절을 남겼다.
“황주(黃州)에서부터 귀신을 다투어 말하니 적현(赤縣 중국)에서 두루 신을 숭배함이 마땅하리.”(一自黃州爭說鬼, 更宜赤縣遍崇神)
과연 5개월 후, 문화대혁명의 겁난(劫難)이 갑자기 닥치며 그의 예언은 현실로 되었다.
이때 그는 호적과 함께 남경까지 갔음에도 대륙을 떠나지는 않은 것을 얼마나 후회했을까? 그는 ‘자유로운 사상, 독립적인 정신’을 받들며 당시의 열악한 생존환경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중공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중공이 그를 용납할 리 없었다. 문화혁명이 시작된 후, 이미 두 눈이 멀고 온몸에 병이 있던 진인각은 급여를 정지당하고, 예금도 동결 당한다.
중산(中山)대학에서 ‘특호반동권위(特號反動權威 특히 반동적인 권위자)’로 비판투쟁을 당했다. 그의 집은 온통 대자보로 뒤덮여 멀리서 보면 마치 흰 관처럼 보였다. 홍위병들은 또 고음의 확성기를 그의 침상 옆에 틀어놓고 이미 두 눈이 멀고 심장병을 앓고 있던 그를 철저히 망가뜨렸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 오후, 이미 기진맥진했던 그는 이렇게 당부의 말을 했다. 그는 “내가 마치 사형수 감옥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고는 “체읍대우의(涕泣對牛衣 부부가 함께 가난하고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의미)”란 시구를 남겼다. 이는 중화문명의 비극이자 중국 현대 역사상 가장 어두운 일막이었다.
환상은 파멸했지만 역사는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심지어 같은 가족이라도 선택이 달라지면서 운명 역시 완전히 달라졌다. 호적이 대륙을 떠나기 전 막내아들 호사두(胡思杜 후쓰두)는 잠시 친척집에 머문다면서 부모를 따라 남쪽으로 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는 호적 부부를 크게 놀라게 했다. 당시 호사두는 미국에서 북평에 돌아온 직후였다. 그는 당시 몇 년간 중국의 상황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저는 또 공산당을 해하는 그 어떤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들이 저를 어떻게 하진 않을 겁니다.”
호적은 당시 사정이 너무 급하고 단기간에 아들의 사상을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놔둘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1950년대 중국에서는 대대적인 호적비판 운동이 일어났다. 호사두는 ‘나의 부친 호적에 대한 비판’을 발표해 부친에 대해 “미 제국주의의 주구이자 인민의 공적”이라고 매도했다. 하지만 1957년, 호사두는 결국 우파로 몰렸고 ‘처벌이 두려워 목을 매 자살했다’. 호적은 1962년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도 아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부사년의 조카 부락환(傅樂煥 푸러환)은 1951년 영국 유학에서 돌아왔다. 부사년이 대만대학이나 역사언어연구소에 배치하려 했지만, 그는 자유와 행복을 상상하며 대륙으로 갔다. 1952년 중앙민족학원의 역사계열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문화혁명 때 부사년에 연루되어, ‘대륙에 심어놓은 스파이’로 몰려 비판투쟁을 당하고 감금되어 잔혹한 시달림을 당했다. 결국 북경의 도연정(陶然亭)에서 투신자살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들과 마찬가지로 중공에 대해 잘 몰랐다. 오히려 마음속에 환상을 품고 있었다. 이는 중공이 입으로 민주자유를 인정한 사기적인 선전과 큰 관련이 있다. 1939년 창간된 중공기관지 ‘신화일보(新華日報)’는 약 10년간 끊임없이 국민당을 비난해왔다. 예를 들어 1939년 2월 25일 문장에서는 이렇게 썼다.
“그들(국민당)은 중국 민주정치의 실현이 오늘의 일이 아니라 수 년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중국 인민의 지식과 교육 정도를 구미의 자산계급 민주국가처럼 제고하고 나서야 비로소 민주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 하지만 바로 민주제도 아래라야 민중을 더욱 잘 교육하고 훈련시킬 수 있다.”
1945년 9월 27일, 모택동은 신화일보 기자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중공의 정치 강령을 이렇게 표방했다.
“자유민주의 중국은 장차 이런 나라가 될 것이다. 그것은 각급 정부에서 중앙정부에 이르기까지 보통평등 무기명 선거로 탄생할 것이며 또한 그것을 뽑아준 인민을 위해 책임질 것이다. 그것은 손중산 선생의 삼민주의, 링컨의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民有民治民享)라는 원칙, 루스벨트의 4대 자유를 실현할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 독립, 단결, 통일 및 여러 민주주의 강대국과의 합작을 보증할 것이다. 여기에 고무탄은 필요하지 않다.”
이런 말들은 당시 에드가 스노우가 쓴 ‘중국의 붉은 별’과 마찬가지로 많은 열정적인 애국청년들을 기만했다. 중국과학원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해외에 거주하고 있던 중국인 과학자들 약 5천여 명 중 1956년까지 2000여 명이 대륙으로 돌아왔다. 다만 나중에 처지는 그들이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1951년 7월,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무녕곤(巫寧坤 우닝쿤)은 국내에서 온 급한 전보를 받았다. 그에게 국내로 돌아와 연경대학(燕京大學 북경대학의 전신) 교수를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는 곧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분교 연구원 겸 강사로 있던 이정도(李政道 리정다오)가 배웅했다. 무녕곤이 갑자기 이정도에게 물었다.
“너는 왜 신중국(新中國)으로 돌아가서 일하지 않니?”
이정도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남에게 세뇌당하고 싶지 않거든.”
나중에 1957년, 무녕곤은 우파로 몰려 온갖 박해를 당했다. 같은 해 이정도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28년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이때 이정도는 중국의 정계요인들이 영접하는 귀빈이었고, 무녕곤은 막 우붕(牛棚 역주: 소외양간으로 문화혁명 당시 지식인에 대한 박해를 상징)에서 풀려나와 내부통제를 받고 있던 ‘우귀사신’(牛鬼蛇神: 문화혁명 시기의 용어. 인민의 이익을 해치는 사악한 세력)이었다. 당시 무녕곤은 북경으로 돌아와서 ‘우파개정’(右派改正)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신문에서 ‘미국 국적의 애국 화교 과학자 이정도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강의한다는 소식을 보게 된다. 그래서 북경반점 국빈관으로 가서 옛 동창을 만난다. 만나서 몇 마디를 나누고 나서 헤어질 때, 무녕곤이 돌연 기발한 생각을 말한다. 만약 그때 자기 대신 이정도를 귀국시켜 교수가 되게 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오함(吳晗): 안타깝게도 길을 잘못 들다
1949년 이후 중공은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중국 지식인들이 받은 박해는 삼천 년 중국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호적에게 대륙에 남아달라고 권했던 오함은 유명한 명사(明史) 전문가이자 호적이 아끼던 제자였다. 호적은 여러 차례 사람들에게 오함은 안타깝지만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소위 ‘신중국’이 창립되자 오함은 신분이 완전히 달라졌다. 정권을 인수한 고위관리의 신분으로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을 장악했다. 일시적으로 뜻을 이룬 후 의기양양해진 그는 호적에 대해서도 전형적으로 ‘배은망덕’한 인물이며 자신이 잘해준 것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호적이 진정으로 ‘길을 잘못 들었다’고 보았다. 스승과 제자 모두 상대방이 길을 잘못 들었다고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역사가 대답해 준다. 다만 역사는 애석하게도 오함에게는 너무나 잔혹했다.
문화혁명 기간 오함은 저 유명한 ‘해서파관(海瑞罷官 역주: 원래 명나라 때 해서라는 관원이 바른말을 하다 파직당한 이야기인데 모택동을 비판한 팽덕회를 비호한 것으로 간주되어 혹독한 탄압을 받게 되고 문화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사건으로 비판투쟁을 받기 시작했다. 나아가 과거 스승인 호적에게 썼던 편지까지 들춰져 그가 호적에게 의탁하려 했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는 여러 번 땅바닥에 꿇어앉아 비판투쟁을 당해야 했으며 온갖 굴욕을 겪어야 했다. 수감된 기간 그는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고, 흉부는 구타로 인해 어혈이 쌓였다. 결국 1969년 10월 오함은 비판투쟁에서 맞아 죽었다. 죽기 전에 양자와 양녀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그저 온통 피로 얼룩진 바지만을 남겼을 뿐이다.
오함과 마찬가지로 대륙에 남는 것을 선택했던 지식인 엘리트들 역시 마찬가지로 중공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역사의 전환점에서, 그들은 벗어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공산주의의 거짓말에 두 눈이 가려져 불행히도 중공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 번역문: 마이너갤러리 중 ‘중공이냐 대만이냐, 공산화 직전 갈림길에서 선택한 학자들의 최후’(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uspolitics&no=140931)를 기본으로 하고 약간 수정을 거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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