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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가니 추위가 오네

한비야의 <그건 사랑이었네>

by 유경재 2010. 10. 29.

언니가 (잠깐) 돌아왔다!

저자의 명성을 익히 알기에 평소보다 일찍 강연장으로 향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한 시간 전부터 행사장 앞에는 긴 줄이 서 있다. 팬미팅 못지 않은 열기. 넓은 강의실에 이내 사람이 꽉 찼다. 누구나 꼭 한번 만나고 싶어하는 언니, 보기만 해도 기운이 불끈 솟아오를 것 같은 언니, 한비야가 유학을 마치고 (잠깐) 한국에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일주일 전만 해도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었던 전(前) 터프츠대학교 대학원생, 전(前) 월드비전 직원, 현재는 백수 한비야입니다.”

한비야는 그렇게 자기소개를 하고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독자들을 둘러본다.

“여러분, 지금 수요일 저녁, 여기 대치동 오지예요. 이런데 까지 찾아오시다니, 여러분이야 말로 열정 덩어리에요. 저에게 열정을 물어보실 게 아닌 것 같아요!”

끊임없이 미소를, 웃음을 주고 받았던 이날의 시간, 초침의 똑딱거림이 아까울 정도로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슈퍼에너지, 그녀는 여전했다. 한비야는 최근 자신의 근황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9년간 현장경험 하면서 아쉬움이 많았어요. 대체 어디에 병목현상이 있나 궁금했어요. 현장과 이론을 겸비하면 좀 더 쓸모 있는 구호요원이 될 것 같아서 찾아보니, 미국 보스턴에 있는 터프츠대학교에 저에게 딱 맞는 과정이 있었어요. 인도적 지원에 관한 석사 과정으로, 2학기 수료하고 논문 제출하면 졸업하는 코스예요. 원래 2년을 계획하고 유학을 갔는데, 1년에 과정을 마친 거죠. 제가 잘해서 그런 게 아녜요. 원래 1년 코스예요.(웃음)”

외로운 타지, 공부하면서 가장 큰 힘이 된 건, 독자들의 서평. 감상을 넘어 독자들의 삶 이야기가 담긴 서평을 보면서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단다. “제가 정말 지치고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을 때 큰 응원이 되었어요. 제가 유학 간다고 하니까, 다들 어디서 돈을 대주신 줄 아는데, 이렇게 생돈 내고 유학 간 거 처음이에요. 『그건 사랑이었네』 팔아서 유학 간 거예요. 그러니까 책을 한 권이라도 사신 분은 저를 유학시킨 분입니다!(웃음) 고마워요.”

한비야, 인생의 환승역에서

 
돌아온 슈퍼에너지! 한비야가 그간의 근황을 전했다.
 

이제 남은 1년, 한비야는 자신에게 안식년을 주기로 했단다. 그녀 나이 서른다섯에 인생 역전처럼 회사원에서 오지탐사원으로 변신,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는 쉼 없이 달려왔다. 오지탐사를 마치자마자 월드비전에 들어가 9년간 정신 없이 일을 했고, 1년간 국제구호 못지않은 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그렇게 꽉 채운 10년이었다.

“즐겁고 뜨거운 삶이었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소진한 것 같아요. 전 지금 인생의 환승역에 서 있어요. 이제 앞으로 적을 둘 곳을 정하지 않았거든요. 큰 터미널에 온 기분이에요. 어느 차를 타야 할까? 내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하고 가슴 뜨거워지는 일을 하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앞으로 어떻게 살 건지, 나라는 꽃을 어떻게 활짝 피울까 고민하고 있어요. 물론, 긴급구호나 국제구호에 관련된 일일 거예요.”

예상치 못한 언니의 고백에, 독자들 숨죽이고 이야기를 경청한다. 마치 앞길을 내다보는 듯 확신의 찬 발걸음으로 오지, 육지, 전쟁터를 걷던 그녀도 이렇게 멈춰서 숨을 고른다.

일단 온전히 주어진 1년, 그동안 꼭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보낼 예정이다. 함박 웃음을 머금고 ‘자랑’한다. 백두대간 종주다. 소개팅보다 산이 좋다는 한비야다운 계획이다.

“대학교 때부터, ‘내가 이번에 간다!’는 말만 지겹게 했어요. 다음 주부터 당장 시작합니다.” 이미 계획도 짜두었다. “일단 24구간으로 나눴어요. 혼자 짐을 지고 걸을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으니, 3박 4일 코스로,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면서 종주할 계획이에요. 한 구간당 1주일씩 걷기로 하면, 6개월 걸려요.”

일단 11월 중순까지 강행할 예정이다. 이후에는 겨울을 피해 중국에 가 있을 예정. “다음 해 봄까지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한국어처럼 잘하고 싶어요. 그렇게 공부하고, 5월에 돌아와 다시 종주를 마무리할 계획입니다. 백두대간 종주하면 좋은 생각들이 많이 날 것 같아요. 그렇게 제 인생의 다른 장으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1958년 아래로 태어난 동생들, 제발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길!

 
여전히 꿈꾸고 있는 한비야 “내 50대가 기대되요!”
 

독자와의 만남 전에 홈페이지를 통해 독자들에게 질문을 받았다. 무대 위에 서기 전까지, 독자들이 남긴 글들을 붙들고 있던 한비야. 가장 많이 나온 질문 몇 가지를 추렸다. 많은 독자들이 매번 한비야에게 답을 구하는 질문들을 추렸다. 역시 1번은 이거다.

“비야 언니, 저 지금 새로 시작하기에 좀 늦은 거 아닌가요?”

방금 전까지, “나의 50대가 정말 기대된다. 앞으로 내가 뭐가 될지 궁금하다!”고 해맑게 외친 비야 언니에게 이런 고민, 있을 수 없는 얘기다! 늦다니, 네버네버네버! 한비야가 매번 책에 쓰고, 강연으로 외쳐서, 그녀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숙지하고 있을 그 이론, 인생 축구장 이론! 여기서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인생을 축구로 보자면, 30대, 전반전 30분 뛰고 있는 선수잖아요. 전반 30분 뛰고 질 것 같다고 포기하는 선수가 어디 있나요? 여러분, 20대에 해야 할 일, 무슨 리스트, 이런 것에 절대 속지 마세요. 사람마다 끓는 점이 따로 있어요. 각각의 끓는 점이 다른데 그깟 리스트에 맞춰보고 늦었다고 합니까? 적어도 수요일 7시 여기 앉아 있는 열정을 가진 여러분은 그러지 말아요. 여러분의 열정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요?”

30대라니, 게임의 전반부도 끝내지 않은 핏덩이란다! 1958년(비야언니 태어난 해다) 아래로 태어난 사람, 동생들! 제발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란다.

“자신과 정면대결 해보세요. 정말 할 수 없는 일일까? 핑계나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닌가? 힘이 없어서 안될 것 같으면, 힘을 키우면 되요. 우린 매일매일 진화하고 책을 읽는 사람이잖아요. 매일 뭔가 노력하는 사람인데, 한계라는 것, 언젠가 넘어설 힘이 생기지 않을까요?”

아무리 얘기해도 다시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지금은…… 그래도 제 상황은……” 한비야는 단호하게 말한다. “받아들이는 건 개인의 몫이에요. 저에게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 질문만큼은 더 이상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50대 넘으면 마치 인생 다 산 것처럼 마무리하려고 하잖아요. 인생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해봐요. 물론 체력은 좀 떨어지겠지만, 인생의 설계는 예전보다 풍요롭고 아름답게 해낼 수 있어요. 끝판이야, 끝물이야 하지 말고 매일매일 업데이트하고 진화 발전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죽는 날이 가장 멋진 날이 되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30대가 뭐라고요? 다시는 그 얘기 듣고 싶지 않아요.”

마지막 순간에 한 번만 더 두드려

 
객석에 앉은 독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 한비야
 

“좌절할 땐 어떻게 하나요?” 이것 역시 한비야에게 ?어오는 단골질문. 늘 웃는 얼굴, 씩씩한 모습 때문에 좌절 따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녀도, 때때로 좌절한다고 고백했다. “제가 하는 일마다 잘되는 게 아니라, 잘 된 일만 얘기하니까 그래요. 저 이번에 보스턴에서도 남자친구 사귀려고 노력했는데 안됐잖아요!(웃음)” 객석에 또 한 번 큰 웃음이 터졌다.

“더 이상은 안될 것 같다, 싶을 때가 있잖아요. 여기까지가 내 최선이고 한계다, 싶은 순간. 그 순간에 저는 딱 한번 더 해봐요. 밤 새도록 문을 두드렸는데 주인이 안 나와요. 딱 한번만 더 두드리면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냥 돌아서는 건 너무 아까워요.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 딱 한번 더 노력하면, 더 이상 후회가 없어요.”

“저도 하고 싶은 일의 반의 반도 못하고 살아요.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의 우선순위 1, 2번을 하고 살기 때문에, 아쉬운 게 없어요. 또 내 힘의 100퍼센트를 쓰고 나면,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어요. 자신감이라는 건, 내가 전부 잘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100퍼센트 몰두 할 수 있다는 자신, 나를 믿는 힘이에요. 그럴 때 결과와 상관없이 자기가 예뻐 보이지 않겠어요?”

한비야는 인생 역시 등산에 비유했다. 각자에게 주어진 어려운 시간들은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오르막길이라고 표현했다. “내리막 길은 근육이 붙지 않아요. 오르막을 오를 때 근육이 붙고 폐활량이 늘죠. 그때 단단해질 거예요. 오르막을 피해가고 싶다는 의견도 존중해요. 다만 오르막이 왔을 때 이게 단련기간이구나, 오르막이라 힘든 거구나, 내 장딴지에 단단한 근육이 붙는 중이구나,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따뜻한 위로의 말도 잊지 않았다. “힘드실 거예요. 여러분. 저도 등산 다니는 사람이라 잘 알고 있습니다. 힘내시고요. 무조건 파이팅입니다. 제 응원이 필요할 때 이 책을 보세요. 저자와 독자가 서로 응원하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35년간 품은 세계일주의 꿈, 갑자기 결정한 것 아냐

 
월드비전에서 활동할 때의 모습 
 

이어 현장에서 독자들의 질문을 받기도 했다. “언니는 외로울 때 어떻게 하나요?” 한비야가 결혼 및 애정전선에 관한 얘기는 사절이라고 진작에 경고(?)했지만, 첫 번째 질문으로 던져졌다. 허나, 궁금한 걸 어쩌나. 찬바람만 불어도 시큰해지는 연약한 우리들처럼 비야 언니도 가끔은 외로울까? 저렇게 강한 언니의 “나도 그래”란 말만 들어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한비야는 그랬다. 우리들과 같이, 웃고 울고, 기뻐하고 그만큼 좌절하고, 외로워하는 “저도 그런 사람이에요” 외로움은 “인생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세트메뉴의 한 가지””다. “가슴 뜨거워지는 설렘, 외로움, 두려움, 흔들리는 마음, 이게 다 한 세트라고 생각해요. 겨울에 추위가 있죠? 추위, 인정! 그럼 난로를 켜거나 따뜻한 옷을 입어서 추위를 달랠 수 있어요. 외로움? 그것도 인정. 징징댈 수 있는 친구를 찾거나, 일기장에 털어놓거나 하는 식으로 달랠 수 있겠죠. 전 개인적으로 일기장을 추천해요. 매일매일의 감정의 변화를 잘 기록하는 일, 내가 얼마나 조금씩 커가는지 지켜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두 번째 질문은 용기에 관한 질문이다. “언니는 어떻게 ‘갑자기’ 세계일주를 떠날 용기를 냈나요?” 한비야는 그 일이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꾼 꿈이에요. 그저 서른 다섯에 구현이 된 거지, 1년 전에 계획해서, 회사 때려 치고 간 게 아니에요. 정말 어떤 일이 쿇고 싶을 때, 다른 것들이 희생이 되요. 그럴 때 용기가 나는 거예요. 정말로 하고 싶은 마음에서 용기가 나는 거죠. 저에겐 그랬어요. 역시 제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 한 일 같아요.”

이어진 질문, “매년 전쟁이 나고, 기아가 발생합니다. 모든 걸 쏟아내도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데 직업적 회의감이 들지 않나요? 어떤 마음 가짐으로 일을 지속해나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비야는 이 ‘핵심 질문’을 듣고, 이제까지보다 한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밤잹 새가며 7만 명을 먹일 식수대를 만들어요. 뒤돌아서면 총탄 소리에 박살이 나 있어요. 이럴 때 우리의 땀은, 우리의 기도는 뭔가요? 아무리 물을 퍼 날라도, 수도꼭지가 다 열려있어서 완전하게 해결이 되지 않아요. 이럴 땐 수도꼭지를 먼저 잠가야죠. 알면서도 힘이 없어서 뒤치다꺼리만 하는 거예요. 정말 안타까워요.”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런 엄청난 고통을 치유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만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함께 두려워하고, 아파하는 것을 함께 아파할 수 있을 뿐이다. 가끔은 고통과 원망과 회의 앞에서 흔들릴지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p.132)

“그러면 이 일을 하지 않았어야 했을까요? 우리는 그 동네 7만 명 사람들에게 물만 가져다 준 건 아닌 것 같아요. 함께 어려움을 넘기길 바라는 사랑을 남긴 것 같아요. 수도꼭지를 잠그고 싶어요. 언젠가 잠글 거예요. 수도꼭지 여는 사람의 팔을 비틀던지, 설득하든지 어떻게 해서든 근본적으로 해결해 악순환을 멈추고 싶어요.” 한비야의 꿈이자 의지다.

이후에 예정되어 있는 강의 일정 때문에 아쉬운 만남은 이렇게 마무리해야 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끊임없이 독자에게 응원을 건넨 그녀는 마지막까지 당부를 잊지 않았다. “도움을 구하는 ARS에 기꺼이 전화 한번 거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죠. 우리는 왜 먹나요? 어차피 죽을 거. 그렇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고, 한 끼 먹을 수 있다는 그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제 책을 읽은 독자들은 그런 ARS가 떴을 때, 기도하는 마음으로 힘을 보태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나는 새로 단 날개를 활짝 펴고 다시 지도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몹시 궁금하다. 그리고 설렌다. 내 등 뒤에서 여러분의 응원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도 여러분을 목청껏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디 잊지 마시길.(p.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