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서 시내를 오갈 때 시내버스 안에서 버스정류장 안내방송 중 지넨타란 정류장이 있는데,
보면 무슨 공원인 듯 하여 언젠가는 한 번 가 보리라 하다가
지난 달 하순 어느날 실행에 옮겼다.
지도를 검색해보니 공원의 정식 명칭은 "회해전역열사기념탑원림"(淮海战役烈士纪念塔园林)이었다.
어쨌거나
그날도 하늘은 유난히 파랬었다.
인증사진도 한 번 남겨본다.
공원 전체 조감도를 보니 문이 몇 개 있는데, 나는 왼쪽, 아마도 남문을 통해 들어온 모양이다.
들어오면 왼쪽 나즈막한 건물이 국방교육관이고 그 맞은편 큰 정방형 건물이 기념관이며,
중앙 도로를 따라 들어오다가 국방교육관 뒷편 흰 조각상들이 오열사 기념동상이고 그 뒷편 오른쪽이 한 열사의 유해가 뿌려진 곳이며 오른쪽 상단 쪽에 보이는 탑이 바로 회해전역열사기념탑이다.
남문 입구에 들어서자 바로 왼편으로 보이는 국방기념관.
바깥에는 각종 무기와 비행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나올 때 보니 아이들이 올라가서 이리저리 만지고 놀고 있었다.
이 공원 자체가 전국적으로 대표적인 애국심 고취 교육장이라고 하니 그 중에 하나가 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이 국방교육관인 것이다.
먼저 오른쪽으로 항일전쟁(1937.7-1945.8.15) 전시관이 나타난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모두 열심이 항일하였지만 결국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결정적으로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었으니, 완전히 자력으로 항전에 승리했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제1부 항일전쟁의 발발.
1937년 7월 7일 북경의 서남쪽 완평현의 노구교란 다리에서 일본군이 병사 한 명이 실종되어 찾겠다고 중국에 허락을 요구하였는데, 중국측에서 들어주지 않자 이를 구실로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중국군에게 공격을 개시,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중국은 바로 이 사건 이후로 공식적으로 항일전쟁 시기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전, 우리나라를 침입해 1910년 한일합방이란 경술국치를 안긴 일본이 만주땅으로 넘어가 중국까지 손에 넣으려고 준비하던 중, 마침내 1931년 9월 18일 만주, 지금의 동북3성인 하얼빈, 길림, 요녕 등 세 개 성을 탈취하여 만주국이란 나라를 세우고 청나라 마지막 비운의 황제 선통제 부의를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그걸 기반으로 남하를 전개하여 마침내 7.7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했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늘 의문이 드는 것은 중국의 항일전쟁은 왜 동북3성과는 무관했던가 이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 초기,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동북3성 만주지역을 중국과는 별도의 지역으로 여겼던 게 아닌가 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겠지만 만일 일본의 위만주국이 성공적으로 후대에까지 이어졌다면 어쩌면 지금의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와 합병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지는 않았을까??? 부질없는 상상에 젖어보기도 한다.
다음 사진은
노구교 사건으로 완평현에 주둔하던 중국군이 급히 일본군과 맞서기 위해 이동 중인 모습.
동북3성은 일본에게 빼앗겨도 괜찮다고 여기고 있었든지 어쨌든지 간에 노구교 사변 이후 중국은 부랴부랴 항일전쟁을 선포, 독려하기 시작한다. 노구교 사건이 발생한지 한 달 반쯤 만에 중국공산당은 섬서성 낙천에서 회의를 열고 전면적인 항일전쟁을 선언했다.
아시다시피 흥중회, 광복회 등의 여러 혁명 조직이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로 통합되어 그 총리로 선출된 손문(쑨원)이 주도한 반청반외세혁명운동은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하다 1911년 10월 10일 호북성 무한에서 드디어 청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혁명의 불길이 세차게 타올라 청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손문은 이듬해인 1912년 1월 1일, 남경에서 중화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북양군벌 위안스카이, 즉 원세개에게 어쩔 수 없이 정권을 물려주게 된다. 이에 손문은 1913년 국민당을 결성했는데, 원세개가 국민당 대리 총통인 송교인을 암살하고 국민당을 해산시켜 버리는데, 1916년 원세개가 죽자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손문이 귀국하여 1919년 오사운동 이후 10월 10일 중화혁명당을 국민당으로 개칭하고 상해에 본부를 두게 된다. 1925년 3월 손문이 간암으로 베이징에서 사망하자 장개석(장제스)이 국민당의 당수가 된다. 그 사이 1921년에는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코민테른(세계공산당연맹)이 중국의 상해에서 진독수(천두슈)를 당수로 하여 중국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몇 년 후 모택동(마오쩌둥)이 진독수를 이어 당수가 되고, 중국의 현대사는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때로는 연합, 때로는 대결하면서 전개된다.
비록 서로 다른 당이지만 일본이란 외세의 침입에는 어쩔 수 없이 협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국공합작이 있게 된다.
요순 때의 팽조가 다스렸던 팽성이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서주이지만, 그 이면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던 전장터라는 슬픈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중원에 위치하여 항상 이해관계가 얽히는 요충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크게는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의 전쟁이 그렇고, 현대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이 모두 결정적으로 이 서주에서 대규모로 벌어졌던 것이다.
아래 사진은 항일전쟁 당시 서주 출신 군인의 기념 사진.
이종인 등 서주에서의 항일전쟁의 주요 장군들.
중국의 현대사는 대체로 손문이 혁명에 성공하고 1912년 1월 1일 남경에서 세운 중화민국임시정부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이후 역사 연도 표기는 대부분 1912년을 민국1년으로 시작하여 표기하는데, 지금도 타이완에서는 이렇게 연도를 표기한다. 그것은 나라의 뿌리가 바로 남경의 중국민국정부 수립이라고 본 것이기 때문이다. 항일전쟁 당시의 신문을 보면 민국26년 8월8일자로 날짜가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1937년 8월8일이란 말이 된다. 당시 신문에 오른쪽 첫단을 보면 난폭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있다. 서주의 시민들이 양식을 절제하여 군인들에게 제공한다 라고 되어 있다.
서주도 마침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전쟁에 패하면 군인들의 죽음은 물론, 무고한 시민의 죽음과 각종 문화재의 파괴, 약탈 등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1938년 이후 일본의 패망 때까지 서주시민들은 망국의 노예가 되어 온갖 수모를 당하게 된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다.
도시 전체의 파괴, 건물의 파괴, 문화재의 파괴, 일본군의 노예가 되는 일 등.
일제하에서의 일본군의 온갖 만행과 서주시민의 참상들, 집단학살, 방화, 파괴, 부녀자강간 등...
일본군의 만행을 좀 더 보자.
항일전쟁에 고삐를 죄다.
비록 근거지는 일본의 수중으로 들어갔지만 수복을 위한 의병의 결성, 유격대식으로 일본군에 대항한다.
항전의 결과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일본은 미국에 항복을 하고 중국에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물러난다.
이로써 중국의 항일전쟁은 끝이 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문서.
중국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은 신라시대 박재상을 떠올릴 정도로 끊임없는 왜구의 침탈, 그리고 본격적인 임진왜란, 정유재란, 그리고 일제강점기 등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악랄하게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던가.
이것은 지금 일본의 원죄이다. 이 원죄 때문에 언젠가는 일본은 우리 민족 앞에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야 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천도는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중국도 결코 일본에 못잖게 우리를 괴롭힌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한사군의 설치에서부터 고구려의 침입, 병자호란, 그 이후도 얼마나 우리를 신하 취급하고 수모를 주었던가.
중국 또한 그 업보를 언젠가는 우리에게 갚아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또 다른 전시실.
이야기할 게 뭐가 또 남았을까?
앞에서 서주에서의 항일전쟁 다섯 장군 중의 한 사람인 이종인.
병기 진열관.
고대 냉병기.
현대 열병기.
비록 중국과 일본의 전쟁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또한 일본과 우리나라의 이야기이기도 하여 보는 내내 우리의 일제강점기가 생각나 우울함과 울분이 떠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 안으로 조금 걸어가니 오른쪽으로 새로 지은 듯한 큰 건물이 보인다.
일단 들어가 보기로 한다.
건물 왼편으로 돌아가니 정문 출입구가 나온다.
회해전역기념관이란 새로 지은 건물이다.
입구가 차단되어 신분증을 검사한다.
나는 외국인인데 오늘 여권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하니 들어가라고 한다.
들어가니
이 기념관은 조금 전에 봤던 국방교육관 전시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다.
즉 일본이 중국에서 물러간 후 본격적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결이 있게 되는데,
그 전쟁 역시 1948년 서주에서의 전쟁이 공산당 승리의 결정적 계기가 되기에 그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라고 되어 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서주대회전 직전의 상황: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받고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곳곳에서 우세를 보인다.
일본의 항복 이후 미국은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전쟁없이 잘 타협하기를 원하는 마음에 1945년 8월 29일, 중경에서 두 당의 회담을 주선했다. 무려 한 달 동안 10차에 걸친 회담을 통해 협정을 맺었으나 이후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구체적으로 실행에는 옮겨지지 못하게 된다.
당시 담판의 주역들인 장개석과 모택동.
10차례에 걸친 회담 끝에 이끌어낸 협정. 공교롭게도 손문이 신해혁명에 성공을 한 날인 10월10일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쌍십협정"이라고도 한다.
국민당의 대표적인 부대 염석산 부대가 공산당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게 된다.
미국과 영국이 장개석 국민당에게 대대적인 원조를 했다고 한다.
1948년 6월 본격적인 서주대회전이 있기 전까지의 국공 양당의 전력 비교.
초기에는 세 배 이상의 차이로 열세를 보이던 공산당의 전력이 후기에는 조금 격차가 줄어들긴 한다.
하지만 그래도 전적으로 열세다.
그런데도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부분 학자들은 민중에 기반을 둔 공산당이 점차 민중의 지지를 얻으면서 그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하며, 그것이 최종 승리에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또 하나 결국은 모택동, 주덕, 주은래, 등소평, 진의 등 공산당 지도자들의 전략이 뛰어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민당의 전략회의 모습 재현.
서주에서의 회해전역 전의 전국 형세도.
빨갛게 표시된 곳이 공산당 근거지고 파랗게 표시된 곳이 국민당 근거지.
숫자로 보면 국민당이 우세였음을 알 수 있다.
공산당의 전략회의 모습 재현.
중간의 글씨는 모택동이 1948년 11월에 쓴 것으로 "군대는 앞으로 전진하고, 생산은 조금이라도 늘려 가고, 기율은 더욱 강화시킨다면 이기지 않는 싸움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주대전에 참여한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의 사령부는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유백승, 진의, 등소평, 률유, 담진림 등 5인.
1948년 겨울 중공중앙군사위 주석 모택동과 부주석 주덕의 결전을 다짐하는 회담.
서주대전의 5인 사령관들.
진의(이후 초대 상해시장이 됨. 지금 외탄공원 입구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등소평,
유백승(앞에 두 사람까지 세 사람 모두 사천성 사람이란 게 공교롭다), 률유,
담진림.
화동지구 각 야전부대에서 속속 서주대전을 위해 모여들고 있다.
열 사람이 다리를 만들고 부대가 지나간다. 이름하여 십인교.
이후 내용은 다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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