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안이 3백 년이란 긴 기간 동안 부를 유지해온 경우는 전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한다.
오직 대한민국의 경주최씨 가문만이 유일하다.
부를 유지한 나름대로의 비법이 있었을 것이며, 그에 대한 내용들이 학문적으로 연구되어 여러 편의 논문과 책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번 경주여행에 있어서 첫번째로 잡은 것이 바로 교동최부자집 고택과 그 주변에 새롭게 조성된 교동한옥마을이다.
입구로 들어가면 오래된 느티나무가 마치 마을의 수호신인 양 버티고 있다.
담쟁이 덩쿨이 기와 담장의 담벼락을 가득 뒤덮고 있다.
꽃들도 나그네의 눈길을 끌고.
남천 옆에 자리한 경주최씨종가고택으로 들어가 본다.
대문.
대문채.
바깥 주인이 거처하던 사랑채.
행랑채 또는 별당이 있던 자리.
주춧돌만 남아있다.
석련지(石蓮池).
연을 기르던 곳이 아니라 물을 담아두던 연꽃 모양의 돌확.
사랑채에는 보다시피 세 개의 편액이 걸려있으니, 바로 "龍庵古宅(용암고택)", "大愚軒(대우헌)", "鈍次(둔차)"이다.
龍庵古宅(용암고택)의 글씨는 최진립 장군의 14대 종손인 우산(愚山) 최채량의 글씨이며, 大愚軒(대우헌)은 최준의 증조부 최세린의 호, 大愚(대우, 크게 어리석음)에서 따 온 것이고, 鈍次(둔차)는 최준의 부친 최현식의 호로서, 재주가 둔해 으뜸이 되지 못함)에서 온 것이다.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처하면서 어리석은 듯 그러내지 않고 버금가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이 어찌 보면 재주가 많은 것, 자신을 드러내는 것보다 재주가 없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만석꾼 부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닌가 한다.
산수유나무가 유난히 많다.
세간에 많이 알려져 있는 가훈 6칙.
첫번째 가르침인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는 뜻은 무엇일까?
높이 올라갈수록 위험해진다는 뜻일까.
마지막의 며느리에게 무명옷을 입힌 이유는 또 무엇일까?
부잣집이라고 해서 자칫 사치하게 되는 마음과 겉치레를 경계하기 위함일까.
안채로 들어가다가 뒤돌아서 본 대문채.
돌확. 즉 돌절구.
장독대와 높이 빼어올린 굴뚝.
설명하시는 분의 설명에 따르면 일제시대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굴뚝 뒷편 왼쪽의 문들도 어쩐지 일본식처럼 보인다.
안채.
대청.
안채는 입구자 형태.
중국식으로 말하면 사합원(四合院).
안채로 통하는 대문 통로는 특이하게도 직선으로 낸 게 아니라, 오른쪽으로 한 번 꺾어들어가게 만들었다.
역시 여자들 위주의 거처라는 안채의 특성을 배려한 것인가.
역시 중국의 옛날 주거형태와 닮아있다.
어리석어서 으뜸이 되지 못하고 항상 버금이 된다는 뜻.
진취적이며, 개성적인 현대인에게는 어쩐지 보신주의 철학이 담겨있는 듯 느껴진다.
사랑채 왼편으로 돌아가면 사당이 있다.
사당으로 난 길.
사당.
오래된 풍경.
비비추?
마침 마루에서 일을 하고 있던 분이 친절하게 사랑채를 구경시켜 주신다.
1970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다시 복원하였기 때문에 고택의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이곳 사랑채는 주인이 머물면서 안채에서 사당 앞쪽으로 난 길을 통해 사랑채 뒷쪽으로 연결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손님이 오면 역시 이곳에 묵었다고 한다.
가운데 문짝이 달린 것은 TV보관하는 곳.
문을 활짝 열면 TV화면이 나온다.
조선 고종의 제5자인 의친왕 이강(李堈)이 사랑채에서 엿새 동안 머물면서 최준(崔浚 1884~1970)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최준은 집안의 마지막 부자였는데 백산 안희제(安熙濟)와 함께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여 막대한 독립자금을 제공하였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백산상회는 결국 부도를 맞게되었고 3만 석에 해당하는 빚을 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 식산은행(殖産銀行)과 경상합동은행에게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는데 식산은행 아리가(有賀光豊) 총재가 최준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빚의 절반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 최준은 김구를 만난 자리에서 안희제에게 전달한 자금이 한 푼도 빠지지 않고 전달된 사실을 확인하고 백산의 무덤에서 그를 기리며 통곡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전 재산은 교육사업에 뜻을 둔 최준의 뜻에 따라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 재단에 기부하였다.
왜, 문파인가?
반월성 남쪽으로, 즉 남산쪽으로 흐르는 내가 바로 남천(南川) 또는 문천(汶川)이라고 하는데, 이 집이 위치한 곳이 바로 문천의 기슭(제방)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문파(汶坡)라고 했던 것이리라.
화재 전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하는데,
예전 건물이지만 현대의 한옥들과 상당히 근접하다.
다락.
천정에서 내려온 쇠고리는 문을 열어서 위로 걸어 두기 위한 장치.
정료대(庭燎臺). 밤에 마당에 불을 밝힐 때 사용하던 석물.
계단 오른쪽 편의 구멍은 굴뚝이라고 한다.
바깥으로 난 문 역시 열어서 추녀쪽으로 들어올려 걸어둘 수 있게 했다.
고택 구경을 마치고 나오니 오른쪽으로 유명한 경주법주 집이 보인다.
지금도 고향 시골에서는 제주로는 대체로 일반 청주보다 좀 비싼 이 법주를 쓴다.
여기가 공장은 아닐 것인데...
입구쪽에는 이렇게 법주가 전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는 단지 전시관 내지는 판매장?
이건 또 무슨 꽃일까?
풍접초?
약초 같기도 하고.
교동의 한 골목.
독립유공자 최완 선생의 생가.
지금도 누군가가 거처하고 있어 들어가 보기가 조금 그렇다.
고택과 함께 부근 전체가 새로 지은 한옥들로 구성된 한옥마을이다.
어쩌면 전주한옥마을을 배워서 만든 게 아닐까 싶은데, 일단 왔으니 천천히 한 번 둘러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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